왜노자A 다이아리 (3) - 영화 '국보' 관람기



#왜노자 ダイアリー (3)

영화 '국보'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영화 '국보(Kokuho, 2025)'는 6월 초에 일본에서 개봉했는데, 주변에서 보러간다든가 추천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음. 12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영화로는 일본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하기도. (*한국은 11월 말에 개봉해 14만 명 돌파)

하지만 이 왜노자는 안타깝게도 일본 대중문화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영화 소재마저 가부키라길래 그다지 끌리지 않았었음. 겨울에 접어든 이 시점, 그저 너무 심심한 차에 영어 자막을 달고 상영을 한다길래 속는 셈치고 보러갔음. 결론적으로, 근래에 본 영화들중에 거의 최고였음.

감독 이상일
촬영 소피안 엘 파니
음악 하라 마리히코
원작 요시다 슈이치 소설 '국보'
주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제작비 12억엔
  
#줄거리 요약 (스포일러)

1960년대 초
일본 나가사키. 소년 키쿠오는 야쿠자 조폭 집안의 후계자인데 가부키(일본 전통 연극)에 재능과 열정이 있다. 특히 여장남자인 '온나가타' 역에 능숙하다. 의외로 야쿠자 두목 아버지도 그런 그를 기특하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라이벌 조직의 습격으로 사망. 엄마는 이미 2차대전 때 원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키쿠오는 고아가 됐다. 미약한 힘으로 아버지와 조직의 복수를 노려보지만 실패. 그는 오사카에 사는 아버지의 지인, 가부키 배우 한지로의 집에 홀로 맡겨진다.

이제 야쿠자로서가 아닌 가부키로 성공하는 게 진정한 복수라는 일념으로 한지로는 연습에 매진한다. 일본 가부키 업계는 유명한 가문 몇 개가 장악하고 있는데 한지로 가문 역시 그 중 하나다. 마침 키쿠오는 한지로의 아들인 슌스케와 동갑내기라서 둘은 절친이 된다.

1970년대
한지로의 혹독한 훈련 끝에 훌륭한 배우로 성장한 키쿠오와 슌스케. 이들은 여장남자 커플로 출연하며 오사카와 도쿄에서 아이돌 그룹 같은 인기를 끈다. 한편 나가사키에서부터 쫓아와 계속 뒷바라지를 해준 어린 시절의 여자친구 하루에는 키쿠오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가 가부키 배우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도우려면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한지로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요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고, 그는 친아들 슌스케가 아닌 제자 키쿠오를 자신의 대타로 세우게 된다. 이는 가문의 후계자를 바꾸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결정. 공연 당일 키쿠오는 큰 무대 앞에서 긴장하지만 슌스케의 대인배 같은 격려에 힘입어 훌륭하게 공연을 마친다.

어쨌든 실력으로 후계자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한 슌스케는 말없이 집과 부모를 떠난다. 하루에 역시 슌스케와 함께 사라져준다. 키쿠오가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도록.

키쿠오, 슌스케, 하루에
1980년대
한지로는 노환으로 사망하고 키쿠오가 한지로 가문을 공식적으로 승계한다. 그러나 안주인을 비롯한 한지로 가문과 가부키 업계 사람들은 혈연이 없는 키쿠오를 여전히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한편 거리에서 7년간 방황하던 슌스케와 하나에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온다. 일본 매스컴은 '사랑스러운 진짜 아들'의 복귀에 열광하고, 디스패치 류의 파파라치들은 키쿠오가 야쿠자 출신이라는 사실(등짝에 부엉이 문신)을 주간지에 보도해 파문을 일으킨다. 키쿠오는 남의 둥지를 가로챈 조폭이라고 전 일본의 비난을 받는다.

편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키쿠오는 하루아침에 모든 배역을 잃는다. 궁여지책으로 업계 유력인사의 딸을 꼬셔서 배역을 따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들통이 나서 실패하고, 그 여인과 함께 거리로 쫓겨나게 된다. 둘은 시골 무대와 음식점을 떠돌며 공연을 하지만 주류 가부키 업계를 벗어나니 먹고살기가 힘들다. 애초에 애정도 없던 관계인지라 생활고에 지친 여친은 키쿠오를 떠난다.

1990년대
시간이 약인가?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키쿠오를 가부키 업계의 대부 '만바키'가 다시 부른다. 만바키는 90세가 넘은 배우로 서민 임대주택에 누워 혼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처지이지만, 가부키 업계 내에서의 영향력만큼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는 키쿠오에게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다시 올라오라'고 말한다.

친구 슌스케는 키쿠오를 반갑게 맞아주고, 일본 대중 역시 키쿠오의 과거를 잊은지 오래다. 다시 뭉친 키쿠오와 슌스케는 여장남자 커플 연기를 예전보다 더 잘 소화하며 다시금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각자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성품도 한층 성숙해진 두 남자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 힘들게 살아온 세월의 영향인지, 슌스케는 당뇨를 심하게 앓게 되어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남은 다리 하나도 절단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친구와 둘이 멋진 공연을 하고 싶다며 의족을 한 채로 훌륭한 공연을 해낸다. 공연의 내용은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죽는 것이다.

2010년대
친구 슌스케가 사망한지도 벌써 20년. 키쿠오는 한지로 가문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일본 정부가 선정하는 국보(인간문화재) 지위에 오른다. 돈도 많이 벌었고 사회 명사 대접을 받는다. 최고의 자리를 얻었지만 아직 그의 마음속엔 무언가 허전한 구석이 있다.

그러던 어느날, 키쿠오는 국보 임명 기념 인터뷰를 하러 온 포토그래퍼가 자신의 친딸임을 알아본다. 과거 자신을 좋아하고 후원해주었지만 영화 출연 분량도 1분밖에 안 되는 교토 기온의 기생이 낳아 길렀는데, 키쿠오는 이 기생이나 딸에게 한 번도 애정이나 관심을 주어본 적이 없다. 장성해서 만난 딸은 키쿠오에게 '악마와 거래한 당신이 죽도록 밉지만, 그래도 매년 당신의 가부키 공연을 TV로 보면서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키쿠오는 이 말에 깨달음을 얻는다.

도쿄 가부키좌에서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샌 키쿠오의 공연이 펼쳐진다. 마지막 막이 내려가고 관객의 박수소리가 젖어들자 그가 평생 추구해온 이미지가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다. "정말 아름답구나" 키쿠오가 말한다.

* 줄거리는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실제 영화 내용에서 틀린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노자 감상
일본의 닫힌 세계들

가부키와 야쿠자는 공통적으로 몇 개의 유력한 가문이 있고 진입과 탈퇴가 제한적인, 매우 폐쇄적인 업계를 구성한다고 알려져 있음. 내부 체계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며 그들 사회만의 특수한 프로토콜을 가지는 등, 외국인은 물론 일반 일본사람에게조차 상당히 낯선 세계임. 그걸 잘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영화는 벌써 볼 가치가 있음.


영화에는 이 두 개의 닫힌 세계를 경험한 주인공이 등장.


주인공 키쿠오는 야쿠자 두목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두목이 살해당하고 조직과 가족이 와해되면서 가부키 하우스에 맡겨짐. 이 사건은 비극이지만, 주인공의 재능을 살리는 기회가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음.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주인공이 가부키 배우로서 정점에 이르는 스토리는 나올 수 없었을 것. 야쿠자 하우스에서 세습을 거절하고 도망쳐서 가부키 배우가 된다? 야쿠자와 가부키를 겸업한다? 아마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주인공의 기질.

등에 야쿠자 출신임을 나타내는 이레즈미(入れ墨, 문신)를 하고,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복수를 꾀하는 주인공. 비극이 없었다면 그가 세습해야할 가업을 버리고 가부키 업계로 투신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가부키 하우스에 가서도 세습자로서 전임자의 빚을 개인적으로 떠앉는 묘사가 나오는데, 그런 성실한 성격의 주인공이 주어진 가업을 스스로 소홀히 했을 것 같지 않음.


두번째. 야쿠자를 보는 일본사람들의 시선.

극중에서 주인공은 야쿠자 두목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업계에서도 배제당하고 커리어가 꺾임. 왜노자가 보기에도 대단히 현실적인 묘사였음.

현대 일본사회에서 야쿠자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배제된 존재임. 예를 들어서 문신한 사람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겪기도 하는데, 문신이 야쿠자를 포함한 반사회적세력의 표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


단적으로 은행에 계좌를 만들러갔는데 내 몸에 문신이 보인다면 아마 안 터줄 거임. 반사회적 세력이 아닌 걸 증명하면 이론적으로 가능한데, 대체로 '다른 데 가보시라'고 하겠지. 아무튼 극 중에서도 키쿠오가 그나마 와해된 조직의 출신이어서 주인공이 가부키 배우로서 가까스로 복귀하는 게 가능했다고 생각함.


어차피 가공의 이야기니까 거칠게 묘사하자면, 집이 극단적으로 망한 덕분에 야쿠자 업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가부키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의 세대 차이

극 초반, 하우스의 적장자인 아들 슌스케와 제자인 키쿠오는 아버지/스승(와타나베 켄)에게 몽둥이로 맞아가며 무지하게 혹독한 가부키 훈련을 받음. 나중에 어른이 된 이 둘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그렇게 혹독하게 대하지 않으며, 다른 취미(농구)가 있단 걸 인정함. 이 장면에서 일본인들이 흔히 말하는 '쇼와시대' 와 그 이후 세대간의 정서 차이를 느낌.


쇼와(昭和)시대는 쇼와 천황이 자리를 지키던 1927년 12월부터 1989년 1월까지를 가리킴. 워낙 길긴 하지만 전쟁 후부터의 경제성장기를 포함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를 좋은 옛 시대로 보는 향수가 있음.


그 이후로 '헤이세이(平成)'와 '레이와(令和)' 세대가 따르는데, 레이와는 현재 불과 7년차이기 때문에 아직 이 둘을 분별하는 세대 기준은 없음. 현재로서는 쇼와시대 자체가 특이한 카테고리이자 일본의 기성세대라고 해석할 수 있음.


또 쇼와시대와 이후 세대 간의 세대차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음. 기성세대는 엄격하고 빡센 교육을 받으며 경쟁하며 왔는데, 젊은 세대는 경쟁이 완화된 환경에서 자랐다는 거.


회사에서도 요즘 들어본 말이었음. 요즘 주니어들은 공부를 안한다나. 너만 공부를 안하는 게 아니라 다들 공부를 안 한다고. 놀라운 건 나는 이 양반이 말하는 젊은 애들과는 상당히 다른 출신이란 거임. 널널한 교육과 경쟁환경이라니? 밀레니얼 세대의 네이티브 코리안이자 외국인 노동자인 나에게는 상당히 낯선 말.


여기서 '태만하다'는 지적은 나 혹은 특정인이 게으른 기질을 보인다는 게 아니라 조직이나 사회 전반에 퍼진 풍조를 말하는 걸 수도 있음. 특히 정부 주도로 노동환경 개선이 이루어지고, 코로나 이후로 근무형태가 유연해져서 예전보다 업무강도 자체도 줄어든 것도 사실이라 윗분들에겐 젊은 세대가 편하게 사는 걸로 보일 수도.


그렇지만 일본사회의 오랜 미풍양속이 빛을 바래는데 유감을 느끼면서 왜 영주권도 안 나온 왜노자한테 책임감과 공감을 요구하는 건지...


영어 자막 상영

이 영화에 영어 자막이 없었다면 아마 난 영화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영화에서 묘사된 시대가 1960년대부터이고, 지리적인 무대가 주로 나가사키, 간사이 지방이기 때문에 낯선 사투리가 나옴. 또한 가부키와 야쿠자라는 특수한 업계에서 쓰이는 용어도 문제. 가부키극 대사는 생활일본어 수준을 겨우 구사하는 나한테 독해가 불가능한 영역임. 


영어자막 상영극에서는 각 가부키 공연 장면에서 제목과 줄거리를 수 초간 띄워줬음. 그 자막들이 없었다면 나는 가부키 공연 장면들은 그저 화면을 구경하는 수준에 그쳤을 것.


당연하지만, 영어 자막 상영 관객 중엔 외관상으로 확실한 외국인들이 많았음. 앞으로도 영어 자막이 지원되는 일본 영화가 있다면 볼 생각.


아쉬운 여성 서사

극의 재미와 무관하게 아쉬웠던 점은 여성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빈약하고 설명력이 약했다는 사실임. 야쿠자 두목 아들이 가부키 배우로 성공한다는 파격적인 설정만큼이나, 하루에가 술집 여급에서 가부키하우스 후계자의 파트너가 되는 건 우연과 설득이 필요한 부분임. (영화 속에서 결혼을 하는 설정은 없지만 파트너처럼 묘사됨)


일본 가부키 하우스에서 배우자는 “리엔(梨園)의 아내”라고 불림. 후원자와의 관계 유지, 적통 후계자 양성과 같은 역할이 기대되는 풀타임 잡. 그래서 가부키 배우와 결혼할 땐 배우자도 사회적인 주목을 받음. 


예를 들어 2016년 여배우 후지와라 노리카가 가부키 배우인 카타오카 아이노스케와 결혼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서양의 꽃이며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백합무늬 기모노를 입은 것이 논란이 되었었음.


물론 내가 일본문화나 전통 예술에 대한 이해가 낮은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한다고 함부로 말할 생각은 전혀 없음. 정치적으로 올바르어야 한다는 강요도 아님. 다만 전통극이나 시대극을 연기한다는 이유로 여성 캐릭터가 심심하고 재미없게 그려진다면 현실과 다르다고 인식되어 위화감을 느끼게 되거나, 컨텐츠로서 매력이 떨어지는 포인트.


'가문' = 주식회사


영화 '국보'의 한지로 가부키 하우스는 세습 후계자와 외부 영입 후계자가 때맞춰 등장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덕에 명성을 지킬 수 있었음. 가부키 하우스가 후계를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이 실제 전통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묘사임.


그게 가부키 하우스가 명맥을 이어온 생존비결. 혈통과 재능에는 각자의 강점이 있는데, 극중에서는 둘 다 중요하다고 말해지지만 순서상 혈통이 우선하지는 않았음. 특정인의 친자를 위해서 하우스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우스는 하우스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지속되는 것.


이것은 상법 상 '계속기업(going concern)'의 가정으로, 현대의 주식회사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 그 안에서 누군가는 예술적인 깊이를 성취해 국보의 경지에 이르든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유명세를 얻든 간에, 개인의 성취는 그 당사자의 과제일뿐이라고 느꼈음.


#퇴근 영상
국보 트레일러

이상일 감독의 인터뷰. 내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도전한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