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금) 왜노자A 다이아리 (2)


10월을 마무리하는 오호츠크 뉴스레터는 일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장인 A씨가 보내드립니다. 지난 7월말에 이어 두 번째 레터입니다.


#왜노자 ダイアリー (2)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문돌이지만 당시 취업이 어려워서 일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함. 나의 첫 직장은 영어와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바이링구얼을 채용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입사함.

지금은 반올림 10년차 “왜노자” 가 되어있음.

돌아보면 일본 기업에서 일할 때의 단점은 대체로 한국 기업에서 일할 때와 비슷함. 대신 일본에 소재한 회사가 주는 장점이 있기에 그걸 선택해서 나는 계속 왜노자로 살고 있음. 한국에 금의환향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한국이 일본의 비교 선택지인지도 잘모르겠음.

요즘은 한국에 계신 분들이 '일본 노동시장의 매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씀을 많이 하심. “일본은 월급이 적지 않느냐" (= 너는 얼마 받냐)라는 말도 몇 번 들어봤음. 그게 궁금하면 "선제시ㅇㅇ* "라 하고 싶기도 하지만, 엔저 시대라서 대체로 맞는 얘기라고는 생각함.

단지 모든 것에 있어 자학적인 문화가 큰 나라에서 오래 살다보니까 특히 금전 문제에 관해 저렇게 자신감 있게 나오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를 접하면 좀 당황스러울 때가 있음. 이것도 한일간 일종의 문화 차이겠지.

일본 기업이 왜노자에게 찾는 언어능력은?

일본 회사들이 외국인을 뽑을 때는 대체로 아래와 같이 언어 능력을 검증함. (어디까지나 대졸 문과 출신으로 입사해 주니어부터 평균적인 회사생활을 한다는 전제임.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국경을 넘나드는 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님.)

  • 일본어 능력 검증: 외국 국적 후보에게 JLPT와 같은 일본어 자격 시험 성적을 정량적으로 요구하는 회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일본인 면접관이 면접을 통해서 의사소통 수준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음.

  • 영어 능력 검증: 영어 면접을 따로 하는 경우는 드문 듯. 영어권 국가에서 학위를 받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배경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고,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량적으로 공인 영어시험 성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음. 열도에서는 특히 '영어 구사력 = 토익 점수'로 여겨짐. 한국의 문과 취준생이 으례 가지고 있을 괜찮은 토익 성적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음.

  • 언어 구사력 배경 검증: 채용이나 이직 면접에서 '너는 (외국인이) 어떻게 일본어와 영어를 그렇게 잘 구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많이 들음. 영어는 어떻게 공부했냐, 일본어는 어떻게 공부했냐 그런 질문임. 그런데 질문의 빈도에 응하는 수준의 모범답변을 준비한 적이 없어서 지리멸렬한 답변을 하곤 함.

얼마 전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주변 외국인 노동자들을 살펴봤음. 그 결과, 사실 밥벌이에 외국어를 쓰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외국어 학습을 위해 끊임없는 동기 부여와 지난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음. 단지 그런 태도가 매일매일의 생활에 일상화되어 있다보니, 정작 내가 외국어 학습을 위해 무얼 했는지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또 어느 순간부터는 '외국어를 배워서 쓴다'는 감각보다는 어떤 '정체성'을 뒤집어쓴다는 느낌을 받고 있음.


일어, 영어, 한국어 다 잘해야 할까

일본어, 영어, 한국어 등 세 개 언어를 비즈니스 레벨로 구사할 수 있다면 일본에서의 구직에 유리하다는 말을 자주 들음. 그런데 내가 아직 연차가 높지 않아서인지, 이 세 언어를 모두 잘 써야하는 상황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함.

내가 경험한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하면...

  • 한국어-일본어 구사🇰🇷🇯🇵 : 한국에 근거지를 둔 일본 회사, 혹은 일본에 소재한 회사가 한국향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 등에 이런 능력의 조합이 적합하겠지만, 내가 그런 회사에 구직한 적이 없어서 잘 모름.

  • 한국어-영어 구사🇰🇷🇺🇸 : 한-영 능력만 있어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포지션이 없지는 않겠지만, 실무자 수준에서는 일본어 구사 능력 없이는 사내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려움을 겪을 듯.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도 국적 불문하고 어려움을 겪음. 문과 직종 한정, 외국에서 일하면서 현지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도 되는 포지션은 세상에 잘 없는 듯.

  • 일본어-영어 구사🇯🇵🇺🇸: 내가 한국어는 기본 장착이라 여기엔 해당 안 됨.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 두 언어가 왜노자의 기본 역량이라 볼 수 있음. 일본 회사들이 조직 규모는 크지만 열도 안에서는 시장의 성장판이 닫혔으니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늘 있음. 그런데 정작 조직 내에서 일본어와 영어로 실무를 할 수 있는 전문성도 갖추고, 피플매니지먼트까지 할 수 있는 중간관리자 급 인재가 잘 없다는 게 문제. 그러므로 일본어-영어를 하는 인재에 대한 수요는 늘 있음.

  • 한국어-영어-일본어 구사🇰🇷🇺🇸🇯🇵: 이건 너무 드문 조합이라 개인의 특장점으로 여겨짐. 사실 다국적 기업들은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선을 긋는 경우가 많음. 한국 시장과 일본 시장이 같은 리포트 라인을 두는 경우가 잘 없음. 예를 들어서, 글로벌 기업 조직 안에서는 일본은 단독 본부 체계로 가고, 한국은 APAC(아시아태평양) 팀에 속해서 홍콩이나 싱가폴에 있는 APAC 지역 본부에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음. 아니면 동북아 3개국이 개별적으로 APAC 지역에 속하거나 혹은 일본 담당자가 한국 시장까지 같이 커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사내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영어를 주로 사용함.

조직 내에서 한국어를 쓸 일은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한국어 능력 때문에 지속적인 고용을 보장할 만큼의 수요는 드문 듯. 만약 오호츠크 독자분들 중에 이 3개 언어 구사력를 잘 살린 포지션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저 부럽습니다.

일본 기업의 실무자는 영어를 못해도 되나

오히려 반대라고 나는 생각. 왜노자는 실무급일수록 영어가 필요.

사실 임원들께서는 이미 대부분 영어를 잘 하심. 혹시라도 영어가 안 되면 회사에서 통역을 붙여도 남는 장사이지만 일개 중간관리자, 일개 담당자에게 통역을 붙여줄 순 없잖음…

미국에서 손님이 오셔서 영어로 농담을 던졌는데 일본사람 과장님이 일 생각하시느라 웃어줄 여유가 없으시면 나 같은 시다바리* 검머외*가 웃어줘야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겠음;

직급이 낮을 수록 언어나 문화에 대해 높은 수준의 이해를 요구받는 건 어딜가도 마찬가지. 

Sensei...Courtesy Warner Bros. Pictures


영어 영어 영어...

왜노자로서 영어 능력을 꾸준히 갈고닦는 가운데, 최근 1:1 프라이빗 레슨 선생님에게영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음. 그 효과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해보니 매우 추천할만한 경험이었음.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얼마나 훈련되었고 남을 가르쳐본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하다고 느꼈음. 내가 만난 선생님은 비영어권 출신 외국인을 가르치는일을 30년 넘게 했고, 각종 영어 공인시험에서 채점도 하는 분이라 평가도 전문적으로 하셨음. 근래엔 일본 회사 재직자들을 많이 가르쳐보셔서 내가 있는 환경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도 좋았음.

단기 수강이고, 돈을 낸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레슨의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음. 그래서 처음부터 아주 명확한 학습 목표를 설정했음. 지금까지 회사생활에서 (주로) 남의 허물과 (약간의) 내가 했던 실수들을 되돌아보니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태도의 차이가 틀린 영어로 전달되거나, 메세지 구조가 정돈되지 않아서 산만한 경우가 가장 많았던 것 같았음. 그래서 나는 "내 영어에서 직장에서 쓰기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고쳐달라, 논리적인 스피치를 할 수 있는 훈련을 하고 싶다"고 말함. 선생님은 일단 해보자며 여러 샘플을 일단 풀어놓음.

샘플 자료를 따라 90분짜리 왜노자 단콘*을 이틀쯤 하고 나니 선생님은 "넌 영어가 문제라기보단 그냥 생각이 많은 것 같다" 라고 했음. 어떤 나쁜 예감이 들어 동네 의원에 갔다가 상위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소견을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 듯. 책임감이 넘치는 선생님은 overthinking에 의해 발생하는 내 영어의 문제점을 열거하고 솔루션을 주셨음. 예를 들어 "There is..." 와 같이 단수형으로 문장을 시작했는데 뒷쪽에서 두 개 이상의 명사를 열거해야할 것 같으면 문장을 한 번 끊으라고 함. 또 시제 오류에 유의하라는 조언도 받음. 

다만 프라이빗 레슨을 오래 받으면 효용이 많이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음. 결국 사람끼리는 관계성이 쌓이면 비언어적 언어소통을 하기 시작하기 마련이라, 따로 말을 안해도 대충 '이 양반이 뭐하려는지 알겠다' 싶은 부분이 생기기 시작했음. 그래서 시간도, 비용도 한정된 가련한 월급쟁이가 프라이빗레슨을 계속하기엔 좀 사치스럽다는 느낌을 받음.

그러므로 잘 훈련된 선생님과 명확한 단기 목표를 설정하고, 개선하고 싶은 점에 집중적인 훈련을 하는 게 월급쟁이 학생에게는 추천하는 영어 학습법.


* 선(先)제시ㅇㅇ: '당신이 먼저 가격을 제시해라'
* 시다바리(下張り): 아랫사람, 잔심부름 하는 사람
* 검머외: 검은 머리 외국인
* 단콘: 단독콘서트


#왜노자A 추천곡
D'Angelo and The Vanguard - Another Lif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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