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몇 권의 책 소개



오호츠크해를 헤엄치는 돌고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해외 체류중인 조진서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 게스트 뉴스레터를 쓰고 있는 노정태라고 합니다.

잠시 제 이력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저는 현재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2학기를 밟고 있는,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입니다. 현재 경제사회연구원이라는 민간 싱크탱크에서 전문위원으로 있기도 하고요. 주로 언론계와 그 주변에서 경력을 쌓아왔지만, 가장 좋아하는 비문학 장르는 서평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뉴스레터는 평소와 다른, 아주 다른 컨셉으로 진행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오호츠크 뉴스레터에서 많이 다루어온 주제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몇 권의 책 이야기를 하는 거죠.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시사뒷북'이랄까... 아 죄송합니다 아저씨라서 아저씨 개그를 하고 말았네요.

시작합니다.
#오늘의 한 마디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계몽이란 무엇인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미국
(피터 왓슨. 박병화 옮김. 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5)

트럼프 vs. 하버드.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귀추가 주목된 뉴스입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하버드 대학에 외국인 유학생 받지 말라고 행정 명령을 내렸고, 하버드는 법적 투쟁에 나섰고, 법원이 곧장 하버드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은 소강 상태가 되었다, 뭐 이 정도가 개략의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제 머릿속에는 『저먼 지니어스』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서지사항은 이렇습니다.

피터 왓슨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지성사학자입니다. 똑똑한 지식인들의 발생, 활동, 죽음, 생애, 그들의 창작물 등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로 다루는 게 전공이라는 뜻이죠.

피터 왓슨은 풍부한 스칼라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읽히는 글을 써내는 능력을 지닌, 대중 소통력을 지닌 1급 학자입니다. 『생각의 역사』 시리즈가 가장 유명한데, 그게 아니어도 피터 왓슨이 쓴 책이라면 뭐든 부담 없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중 오늘의 주제인 『저먼 지니어스』로 들어가 보죠. "유럽의 세 번째 르네상스, 두 번째 과학혁명, 그리고 20세기"라는 부제가 말해주고 있다시피, 저자는 독일(어권)이 낳은 찬란한 성과에 주목합니다. 출판사 책 소개를 읽어볼까요?


"칸트·헤겔·쇼펜하우어·니체·비트겐슈타인·하이데거가 철학을, 하이든·베토벤·슈베르트·모차르트가 음악을, 릴케·하이네·괴테·헤세·브레히트·실러가 문학을, 멘델·아인슈타인·가우스·슈뢰딩거·하이젠베르크가 과학의 금자탑을 쌓았던 곳, 그리고 마르크스·베버·프로이트·융·아도르노·루카치·벤야민·야스퍼스·지멜·하버마스·아렌트…

이 '독일 천재'를 보면 가난한 변방에 불과하던 독일이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지적·문화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보다 더 창조적이고 뛰어난 나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낸 나라, 내면의 풍요를 이상으로 삼았던 교양국가, 교육받은 중간계층을 최초로 형성한 나라, 대학과 연구소의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이 대단한 독일이 왜 망했느냐. 이유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나치가 득세하면서 학문의 자유가 보장받기 어려워졌고, '저먼 지니어스'들이 다른 유럽 국가로, 영국으로, 결정적으로 미국으로 대거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의 천재들, 그 천재들을 낳은 맥락 전체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았죠. 『저먼 지니어스』도 그 점을 언급하고 있거니와, 출판사 책 소개는 더욱 그쪽에 방점을 찍습니다.

하지만 피터 왓슨 본인 평소의 논지도 그렇고 책의 주제도 그래요. 『저먼 지니어스』는 독일의 지적 퇴행에 대해 뼈아픈 지적을 안 하지만 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은 당연히 2020년대의 미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경제
(앨버트 O. 허시먼. 노정태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20)

문무겸비, 팔방미인, 르네상스적 인간, 등등. 앨버트 허시먼은 그런 찬사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1915년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난 '저먼 지니어스' 허시먼은 독일, 프랑스, 영국, 심지어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대학교를 오가며 경제학을 공부한 인물입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은 당연히 구사했고, 심지어 이디시도 할 줄 알았습니다. 유대인이었거든요.

본업은 경제학자였던 허시먼. 하지만 의협심이 강했고,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학업과 현실 참여를 병행했는데,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곧 전쟁이었죠.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던 허시먼은 이후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유대인인 스스로를 마지막으로 탈출시켜, 뉘렌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통역을 했고, 이후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경제학자로 살아갔습니다. (저먼 지니어스 ㅇㅇ)

허시먼은 여러 책을 썼는데 그 중 오늘 다룰 책은 『정념과 이해관계』(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입니다. 자본주의가 등장한 초기, 자본주의가 왜 바람직한지 옹호한 계몽사상가들이 있었죠. 그들은 '왕의 자의적 정념에 휘둘리는 군주정과 달리 자본주의는 이해관계를 따라 움직이므로 예측 가능하고 따라서 모두에게 더 좋다'는 논변을 폈죠. 요컨대 정념과 이해관계의 대립 구도에서, 이해관계가 정념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우리만 해도 '정치권에 휩쓸리는 대신 시장 논리를 따라야' 같은 주장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잖아요. 17, 18, 19세기까지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죠. 자본주의야말로 때로는, 혹은 많은 경우, 정념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가령 그 온갖 분위기 타고 움직이는 개잡주... 아, 아닙니다). 정념 대 자본주의의 대립 구도는 현상을 이해할 때보다 어떤 구호로 쓰이기에 더 쉽습니다. 너무도 단순 명료하거든요. 현실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이들은 영원히 무해할 것이라는 생각을 최종적으로 포기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현실이 온전히 가시화된 다음의 일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나타난 경제성장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삶을 뿌리 뽑고, 소수를 부유하게 만드는 가운데 수많은 집단들을 가난에 빠뜨리며,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불황기에 대규모의 실업을 야기하고, 현대 대중사회를 낳음에 따라, 이 같은 폭력적 전환 과정에 휘말린 사람들이 때로 강렬한 분노, 공포, 원망 같은 정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트럼프 관세 전쟁을 바라보면서 『정념과 이해관계』를 떠올렸습니다. 트럼프가 장사꾼인데 어떻게 미국에 손해 끼칠 일을 하겠냐는 예측이, 2기 트럼프 취임 전까지만 해도 적지 않았지만, 아니라는 게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이 질문에 답을 해봐야겠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해관계를 통해 정념의 변덕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획은, 물론 종종 뜻대로 되지만, 전적으로 의존할만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트럼프는 미국 전체의 부가 늘건 줄건 '미국의 위대함'을 느끼고 싶다는,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미드웨스트 유권자들의 열망을, 정념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포워딩 받으셨다면 아래 버튼으로 구독하세요.

#중동
(테오도르 헤르츨. 이신철 옮김. 서울: 도서출판b, 2012)

허시먼 이야기를 하니 유대인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허시먼 본인도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저먼 지니어스' 중 한 사람이었다고요.

하지만 모든 유대인이 천재인 것은 아니고, 천재 유대인이라고 해서 꼭 안전과 안녕을 보장받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유럽에서 계속 차별과 탄압을 받아온 유대인으로서는 '개인적 탁월성'을 넘어서는 어떤 집단적 안전 보장의 방법이 필요했죠. 반유대주의 선동이 점점 심해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되고 커져간 이유입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기자였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죠. 유럽에 번져나가는 반유대주의의 불길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헤르츨은 유대인이 유럽에 동화되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는 부질 없었습니다. 왜? 유대인 문제는 유대인이 문제를 만들어서 생기는 문제라기보다, 유대인이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문제가 존재하는 곳은 유대인이 눈에 띄게 존재하는 모든 곳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법은 단 하나 뿐입니다. 유대인이 모여 사는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죠. 유대인이 국가 없는 민족으로 남아있는 한 지속적인 박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에 바탕을 둔 해법이었죠.

지금은 시오니즘이 무슨 악마의 이념 취급을 당합니다. 하지만 시오니즘이란,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대 버전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게다가 직접 읽어보면 테오도르 헤르츨의 논지와 논조는 매우 온건하고 평화적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고 싶다면 유대인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 문제를 알고 싶다면 시오니즘에 대해 알아야겠죠. 시오니즘에 대해 알 수 있는, 시오니즘의 선언서라 할 수 있는 문헌이 이미 번역되어 있습니다.



#문화
(피터 브라운. 양세규 옮김. 서울: 비아, 2025)

올해의 책. 2025년 5월 현재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올해 읽은 모든 책 중 가장 즐겁고, 신선한 통찰을 주었으며, 심지어 시의적절했습니다.


피터 브라운은 로마 제국 말기를 전공한 역사학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새물결, 2012)가 주저고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죠.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역사학자입니다. 에릭 홉스봄, 니얼 퍼거슨, 혹은 유발 하라리 같은 대중적(으로도 잘 팔리는) 역사학자와는 다르죠.

이 책의 주제도 고대 로마의 말기입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그들'은, 그러므로, 기독교인이죠. '로마는 어떻게 기독교화되었는가' 내지는 '로마의 기독교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과연 얼마나 올바른가'가 이 책의 주제입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며 상관이 있다 한들 너무 어려운 주제 아니냐 싶으시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강연록이어서 문장 자체가 쉽게 이해 가능합니다. 또한 번역자가 훌륭해요. 독자가 읽기 쉬운 문장으로 정확한 번역을 했고, 역자 주, 더 나아가 인명 색인까지 충실히 달았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종교는 그냥 '믿습니다' 같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이 걸린, 아니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세계관 전체의 문제였죠. 그러니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비가역적으로 진행되었죠.


"하지만 역사가에게 정말 설레는 일은 밀려드는 파도를 버텨낸 모래성의 일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의 『밤의 역사』Storia Notturna를 읽어 보면 1457년 브레사노네에서 발 디 파사의 노파들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들이 "모든 부와 행운의 어머니" 리켈라La Richella의 덥수룩한 곰 발바닥 같은 손을 만졌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였습니다.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긴즈부르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 알프스 산골짜기 마을에선 그때까지도 고대 그리스 브라우론에서 숭배하던 여신 아르테미스가 건재했던 것입니다."


세 편의 강연록이 끝난 후 부록으로 딸린 "배우는 삶"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역사적인 내용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 부록을 읽으셔야 합니다.

피터 브라운은 아일랜드의 개신교도, 즉 소수자의 소수자로 태어났습니다. 아일랜드인에게 종교란 그냥 일주일에 한 번 교회나 성당에 가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생 전체를, 삶의 모든 것을 꿰뚫는, 말 그대로 '가장 높은'(宗) '가르침'(敎)였죠.

고대 로마 말기에 벌어진 종교적 대전환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피터 브라운 본인의 삶이 있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이건 제 추측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어떤 인문학자가 자신의 삶까지도 인문학적 시각으로 해석해내는,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텍스트인 것이죠.

역사가 정치에 너무도 심하게 오염되어, '네 편의 역사'와 '내 편의 역사'끼리 전쟁을 벌이는 게 너무도 당연시되는, 그런 지금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지긋지긋한 분들께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갈 때』는 짧지만 좋은 힐링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퇴근송
Aespa - Whiplash


오늘 게스트 레터를 쓰느라 수고해주신 노정태 님을 위해 editor@55check.com으로 의견과 소감을 보내주세요. 레터에 실리면 책을 한 권 보내드립니다.

editor@55check.com
오호츠크 퍼블리싱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9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