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영국 가구들이 19세기 같은 '연료 빈곤'을 겪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캠브리지대에서 강태준 기자가 보내온 글.
2022년 12월. 나는 파트타임으로 다니는 대학원 수업을 위해 영국을 찾았다. 평소엔 집에서 수업을 듣지만 한 학기에 몇 주는 학교에 출석해야 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니 영국 특유의 축축한 한기에 몸이 절로 부르르하고 떨려왔다. 두터운 옷을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케임브리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미 비가 내리고 있어 가뜩이나 우중충했던 바깥 풍경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자 되자 철저한 암흑으로 변했다. 칠흑 같은 창밖을 보며 M25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마치 아포칼립스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것과 같은 착각이 일었다.
우리 학교의 기숙사는 지어진지 500여 년이 다 돼간다. 제아무리 내부 개조를 했다 한들, 뜨뜻한 온돌방에 길들여진 한국인 입장에서 이 낡은 건물의 난방이 제대로 되어있다고 느낄 리 만무하다. 설상가상 학교 측에선 에너지 절약을 핑계로 겨울마다 '간헐적 난방'을 실시한다. 결국 나는 방 안의 추위 탓에 심한 감기에 걸려 학교에 머무르는 내내 고생을 했다.

Christmas Carol, Charles Dickens, 1843
춥고, 축축하며, 어둡다. 영국의 겨울을 떠올리면 드는 생각들이다. 영국인들조차도 겨울의 영국은 될 수 있으면 피하라 말한다. 하지만 영국의 이런 겨울의 기후적 특성이 주는 그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영국 예술가들이 감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깊은 작품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인간의 고독, 가난, 사회적 불평등 같은 주제를 강조하는 데 음울한 겨울 날씨를 자주 사용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가 대표적이다.
디킨스의 작품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창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은 가난과 추위에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킨스 시대에는 추위와 가난은 흔히 함께 다가오는 문제였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난방비 지출은 사치에 불과했다. 디킨스는 스크루지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추위 속에 방치된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적은지를 꼬집었다. 한데, 1843년에 출간된 디킨스 작품에 담긴 묘사가 오늘날 현대 영국 사회의 현실과 닮아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연료 빈곤(fuel poverty). 영국 가정이 기본적인 난방과 온수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지칭하는 단어다. 2023년 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8%에 달하는 560만 가구가 연료 빈곤 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주요 원인은 전기, 가스 요금의 상승이다. 영국의 에너지 규제 기관 Ofgem이 발표한 새로운 가격제에 따르면, 지난 10월부터 가구당 에너지 요금이 연 평균 1717파운드(약 300만 원)로 오르게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1216파운드(약 210만 원)였다. 이 가격은 일반 가정의 연간 평균 에너지 사용량을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추운 가을과 겨울이 오면 실제 요금은 더 높아질 수 있다.
Ofgem은 이런 인상의 주요 원인으로 우크라이나 발 정치적 긴장과 극단적 기후 현상으로 인한 국제 에너지 시장 가격 상승을 지목했다. 이렇게 에너지 요금이 오르며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자 많은 가정이 겨울철 난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난방비 부담 때문에 많은 가구들이 극단적인 에너지 절약을 시도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23년 시민단체 전국에너지행동(NEA)이 여론조사기관 YouGov와 함께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영국 가구의
- 43%가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있다.
- 22%는 실내 온기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하루 종일 커튼을 치거나 창문에 신문지를 붙인다.
- 또 약 200만 가구가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해 전기·가스 공급을 스스로 차단하는 ‘자가단전’을 한다.
건물 노후화도 문제다. 오래된 영국 건물들은 열 손실이 크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창문을 에너지 절약형으로 교체하거나 벽에 단열재를 보강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개선에 따르는 비용 부담으로 인해 망설이는 가구가 많다.
낮은 실내 온도가 초래하는 건강상의 위험도 크다. 보건 전문가들은 혈압 상승으로 인한 뇌졸중, 심장마비, 폐렴, 기관지염,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등 호흡기 감염을 주요 위험으로 꼽는다. 또 체력과 민첩성 저하로 인한 낙상사고,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등 정신건강 문제도 있다.
또한 낮은 실내 온도로 인한 습기와 곰팡이는 천식, 만성 통증과 같은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특히 호흡기 질환이나 심혈관 질환을 이미 앓고 있는 만성질환자들의 경우 증상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겨울철 초과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호흡기 질환, 순환기 및 심혈관 질환, 치매 역시 모두 추운 실내 환경에서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정부 역시 2019년 기준으로 국가 건강보험(NHS)이 추운 주거환경과 직접 관련된 질병 치료에만 연간 최소 14억 파운드(약 2조5000억 원)를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올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이 연료 빈곤 문제가 다시 한번 영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얼마 전 정권을 잡은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신임 총리가 고령층에 대한 겨울철 난방비 지원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이 담긴 공공지출 조정안을 밀어붙이면서다.
영국은 그간 소득에 상관없이 80세 이상은 해마다 300파운드(약 53만 원), 66세 이상 80세 미만은 200파운드(약 25만 원) 씩 보조금을 지원해 왔다. 하지만 올 여름 출범한 스타머 정부가 난방비 지원금을 일부 저소득층에게만 지급하는 것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대대적인 공공부문 지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는 약 15억 파운드(약 2조 6천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것으로 본다.
반대편인 보수당은 물론이고 노동당 일각과 여러 노동조합에서도 비판이 나왔지만 스타머 총리 등 고위 각료들은 전임 보수당 정부로부터 구멍 난 공공재정을 물려받은 탓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당내 단결을 요구했다. 스타머 총리는 “인기 없는 선택도 해야 한다"라며 선별적 복지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사실 영국의 연료 빈곤 실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연료빈곤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4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대에는 연료 빈곤 가구가 40%나 감소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최근 5년간은 의미 있는 감소세를 전혀 보이지 못했다. 획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원회는 가장 시급한 해결책으로 '단열 우선' 정책을 강조했다. 난방 보조금보다 주택 단열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따뜻하고 경제적이며 곰팡이와 습기가 없는 집을 제공하기 위해 2030년까지 민간 및 사회 임대주택의 최소 에너지 효율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을 올 연말까지 협의하기로 했다. 이 방안을 시작으로 단열재 설치부터 태양광 패널과 히트펌프 보급까지, 영국 전역의 주택을 더 깨끗하고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변화시킬 예정이라고 공언했다.
과연 정부의 계획대로 2030년 이후엔 영국인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산업혁명 이후 18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기술과 경제, 복지 제도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고 쉽게 자부하곤 한다. 그러나 디킨스가 그렸던 어두운 겨울 속에서 난방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영국의 많은 가정에서도 여전히 현실일 뿐이다.
한기 가득한 캠브리지 기숙사 방에 누워 생각했다. 디킨스의 스크루지가 시린 방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21세기에도 재연되고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잠을 설치던 난 결국 기숙사 관리인에게 SOS 요청했고 관리인은 내게 선심 쓰듯 이불 한 장을 더 가져다주었다. 이불 두 장을 뒤집어쓰고서 그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강태준 외신 저널리스트/추리소설 작가
선진국 영국 가구들이 19세기 같은 '연료 빈곤'을 겪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캠브리지대에서 강태준 기자가 보내온 글.
2022년 12월. 나는 파트타임으로 다니는 대학원 수업을 위해 영국을 찾았다. 평소엔 집에서 수업을 듣지만 한 학기에 몇 주는 학교에 출석해야 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니 영국 특유의 축축한 한기에 몸이 절로 부르르하고 떨려왔다. 두터운 옷을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케임브리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미 비가 내리고 있어 가뜩이나 우중충했던 바깥 풍경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자 되자 철저한 암흑으로 변했다. 칠흑 같은 창밖을 보며 M25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마치 아포칼립스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것과 같은 착각이 일었다.
우리 학교의 기숙사는 지어진지 500여 년이 다 돼간다. 제아무리 내부 개조를 했다 한들, 뜨뜻한 온돌방에 길들여진 한국인 입장에서 이 낡은 건물의 난방이 제대로 되어있다고 느낄 리 만무하다. 설상가상 학교 측에선 에너지 절약을 핑계로 겨울마다 '간헐적 난방'을 실시한다. 결국 나는 방 안의 추위 탓에 심한 감기에 걸려 학교에 머무르는 내내 고생을 했다.
Christmas Carol, Charles Dickens, 1843
춥고, 축축하며, 어둡다. 영국의 겨울을 떠올리면 드는 생각들이다. 영국인들조차도 겨울의 영국은 될 수 있으면 피하라 말한다. 하지만 영국의 이런 겨울의 기후적 특성이 주는 그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영국 예술가들이 감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깊은 작품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인간의 고독, 가난, 사회적 불평등 같은 주제를 강조하는 데 음울한 겨울 날씨를 자주 사용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가 대표적이다.
디킨스의 작품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창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은 가난과 추위에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킨스 시대에는 추위와 가난은 흔히 함께 다가오는 문제였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난방비 지출은 사치에 불과했다. 디킨스는 스크루지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추위 속에 방치된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적은지를 꼬집었다. 한데, 1843년에 출간된 디킨스 작품에 담긴 묘사가 오늘날 현대 영국 사회의 현실과 닮아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연료 빈곤(fuel poverty). 영국 가정이 기본적인 난방과 온수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지칭하는 단어다. 2023년 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8%에 달하는 560만 가구가 연료 빈곤 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주요 원인은 전기, 가스 요금의 상승이다. 영국의 에너지 규제 기관 Ofgem이 발표한 새로운 가격제에 따르면, 지난 10월부터 가구당 에너지 요금이 연 평균 1717파운드(약 300만 원)로 오르게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1216파운드(약 210만 원)였다. 이 가격은 일반 가정의 연간 평균 에너지 사용량을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추운 가을과 겨울이 오면 실제 요금은 더 높아질 수 있다.
Ofgem은 이런 인상의 주요 원인으로 우크라이나 발 정치적 긴장과 극단적 기후 현상으로 인한 국제 에너지 시장 가격 상승을 지목했다. 이렇게 에너지 요금이 오르며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자 많은 가정이 겨울철 난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난방비 부담 때문에 많은 가구들이 극단적인 에너지 절약을 시도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23년 시민단체 전국에너지행동(NEA)이 여론조사기관 YouGov와 함께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영국 가구의
건물 노후화도 문제다. 오래된 영국 건물들은 열 손실이 크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창문을 에너지 절약형으로 교체하거나 벽에 단열재를 보강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개선에 따르는 비용 부담으로 인해 망설이는 가구가 많다.
낮은 실내 온도가 초래하는 건강상의 위험도 크다. 보건 전문가들은 혈압 상승으로 인한 뇌졸중, 심장마비, 폐렴, 기관지염,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등 호흡기 감염을 주요 위험으로 꼽는다. 또 체력과 민첩성 저하로 인한 낙상사고,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등 정신건강 문제도 있다.
또한 낮은 실내 온도로 인한 습기와 곰팡이는 천식, 만성 통증과 같은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특히 호흡기 질환이나 심혈관 질환을 이미 앓고 있는 만성질환자들의 경우 증상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겨울철 초과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호흡기 질환, 순환기 및 심혈관 질환, 치매 역시 모두 추운 실내 환경에서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정부 역시 2019년 기준으로 국가 건강보험(NHS)이 추운 주거환경과 직접 관련된 질병 치료에만 연간 최소 14억 파운드(약 2조5000억 원)를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올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이 연료 빈곤 문제가 다시 한번 영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얼마 전 정권을 잡은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신임 총리가 고령층에 대한 겨울철 난방비 지원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이 담긴 공공지출 조정안을 밀어붙이면서다.
영국은 그간 소득에 상관없이 80세 이상은 해마다 300파운드(약 53만 원), 66세 이상 80세 미만은 200파운드(약 25만 원) 씩 보조금을 지원해 왔다. 하지만 올 여름 출범한 스타머 정부가 난방비 지원금을 일부 저소득층에게만 지급하는 것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대대적인 공공부문 지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는 약 15억 파운드(약 2조 6천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것으로 본다.
반대편인 보수당은 물론이고 노동당 일각과 여러 노동조합에서도 비판이 나왔지만 스타머 총리 등 고위 각료들은 전임 보수당 정부로부터 구멍 난 공공재정을 물려받은 탓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당내 단결을 요구했다. 스타머 총리는 “인기 없는 선택도 해야 한다"라며 선별적 복지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사실 영국의 연료 빈곤 실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연료빈곤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4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대에는 연료 빈곤 가구가 40%나 감소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최근 5년간은 의미 있는 감소세를 전혀 보이지 못했다. 획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원회는 가장 시급한 해결책으로 '단열 우선' 정책을 강조했다. 난방 보조금보다 주택 단열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따뜻하고 경제적이며 곰팡이와 습기가 없는 집을 제공하기 위해 2030년까지 민간 및 사회 임대주택의 최소 에너지 효율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을 올 연말까지 협의하기로 했다. 이 방안을 시작으로 단열재 설치부터 태양광 패널과 히트펌프 보급까지, 영국 전역의 주택을 더 깨끗하고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변화시킬 예정이라고 공언했다.
과연 정부의 계획대로 2030년 이후엔 영국인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산업혁명 이후 18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기술과 경제, 복지 제도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고 쉽게 자부하곤 한다. 그러나 디킨스가 그렸던 어두운 겨울 속에서 난방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영국의 많은 가정에서도 여전히 현실일 뿐이다.
한기 가득한 캠브리지 기숙사 방에 누워 생각했다. 디킨스의 스크루지가 시린 방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21세기에도 재연되고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잠을 설치던 난 결국 기숙사 관리인에게 SOS 요청했고 관리인은 내게 선심 쓰듯 이불 한 장을 더 가져다주었다. 이불 두 장을 뒤집어쓰고서 그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강태준 외신 저널리스트/추리소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