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말라 해리스의 필라델피아 마지막 유세장

2024-11-06


(뉴스레터에 실린 글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저는 지금 승부처인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습니다. 해리스 유세에 갔다가 방금 돌아왔습니다.

펜실베니아는 19명의 선거인단이 걸린, 가장 큰 스윙스테이트입니다. 펜실베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민주 공화 양 정당이 엄청난 홍보전을 벌이고 있어서 길거리 광고판마다 해리스나 트럼프 광고가 걸려있습니다. TV와 SNS에도 선거 광고가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공격의 수위도 높습니다. 

해리스는 마지막 유세를 여기 필라델피아의 미술관 앞 '록키 계단(Rocky Step)'에서 열었습니다.

록키 계단은 영화 '록키'(1976)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조깅을 하고 만세를 부르는 곳으로 유명합니다.(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그 영화는 록키의 졌잘싸로 끝납니다...)





  •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1~2만 명은 되어보였습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신분증 검사는 하지 않고 참가확인 이메일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 민주당 상징인 푸른색 옷이나 해리스의 상징인 보라색 옷을 입고 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 홈페이지에는 오후 5시부터 이벤트가 시작되는 것처럼 적혀있었는데 실제론 밤 11시에 시작했습니다. 밤이 쌀쌀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밤 11시가 되자 가수 리키 마틴이 나와 노래 2곡을 불렀고, 레이디 가가도 나와서 피아노를 치며 30초 짜리 짧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후 토크쇼 진행자로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가 나타나 찬조연설을 하다가 해리스의 남편과 해리스를 차례로 불러냈습니다.

  • 해리스는 많은 박수를 받으며 나타났지만 이미 청중은 춥고 지친 상태. 게다가 그의 연설은 연극 대본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현장의 청중들과 교감하기보다는 TV나 유튜브를 보는 시청자들에 맞춰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연설 중간에 추위에 지친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 연설은 20분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11시 40분에서 55분까지, 15분 정도 한 것 같습니다. 내용은 '페이지를 넘기자'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 등이었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이 듣기엔 조금 맥 빠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차라리 트럼프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바닥 해줬으면 청중들이 환호했을 것 같습니다만 해리스는 교과서 같은 얘기만을 했습니다. 굳이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공화당 후보가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북한의 김정은이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난한 얘기들이었습니다.


  • 단 한 가지, 낙태권 관련해서는 확실한 각을 세웠습니다.


  • (연설문을 다 읽자) 그야말로 썰물처럼 유세장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갔습니다. 해리스 부부는 아직 연단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좀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추운 날씨 속에서, 선 채로 최대 7시간을 기다린 청중들 생각도 해줘야죠. 주차 때문? 글쎄요. 주변엔 주차장이 없고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순수히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 해리스 부부가 무대 뒤로 사라지기도 전에 파장 분위기가 됐는데, 아까 집에 간 줄 알았던 레이디 가가가 다시 나왔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노래를 한 곡 더 불렀습니다. 원래 계획된 순서였던 것 같은데 이미 앞쪽 청중들이 너무 많이 떠나버려서 레이디 가가도 뻘쭘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노래부르고 멋있게 손 흔들며 이날의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프로답네요. 


트럼프의 마지막 유세는?


  • 숙소에 돌아오면서, 그 시간까지 미시간에서 열리고 있는 트럼프의 유세 연설을 유튜브 라이브로 들었습니다. 자정 넘어 시작했다고 합니다. 해리스 유세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 트럼프는 늘 그렇듯,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30분 정도 넉살을 떨며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썰을 풉니다. 그러다가  '아, 그런데 부하들이 준비한 대본 내용은 아직 시작도 못했네?'라고 너스레를 떱니다. '프롬프터 없으면 연설을 못 하는 사람(해리스)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안되겠죠?'라고 농담도 합니다.


  • 그때부터 그는 청중들과 잡담하듯이 온갖 주제를 오가면서 1시간 반을 더 떠듭니다. 마지막 연설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수위가 조금 셌습니다. 낸시 펠로시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b로 시작하는 다섯 글자 욕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또 '카말라 해리스는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면서 해고하고 싶다고 합니다. ("You're fired"). 


  • 그는 마지막으로 자녀와 며느리 사위들까지 연단 위로 불러내서 한 마디씩 시킵니다. 그리고는 "I love you. I lov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 유세가 끝난 시간은 새벽 2시 10분입니다.


해리스와 트럼프 연설의 차이점은 이랬습니다.


두 후보의 연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니 차이가 확연했습니다.

  • 해리스의 연설은 현장의 청중이 아니라 신문, 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접할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농담이나 잡담은 거의 없고, 사전에 준비된 멋있고 점잖은 문구들을 ㅏㅁㄹ합니다. 즉흥성은 없습니다. 길게 하지도 않습니다.


  • 이런 해리스의 연설은 기자들이 신문이나 방송에 기사화했을 때 매우 고상하게 보이고 고상하게 들립니다. 언론사 기자들은 연설 내용의 일부, 한두 문장만을 발췌해서 기사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들으면 지루한 내용이라도 미디어라는 필터를 거쳐서 딱 한두 문장씩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멋있게 보입니다.


  • 트럼프의 연설은 해리스와는 달리 집회 현장을 찾아온 청중들을 즐겁게 하는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정해진 대본을 따라가기보다는 그냥 자기 머릿속에서 생각나는대로, 청중이 반응하는 대로 두서 없이 한두 시간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긴 시간 동안 청중의 관심을 붙잡아야하므로 그는 친구들끼리 잡담하는 것처럼 농담도 많이 던지고 글로 쓰기 어려운 저속한 말도 가끔 집어넣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기사화되면 트럼프의 연설은 저급하고 공격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트럼프와 해리스는 유세 기간 동안 적게는 하루에 2회, 많게는 5회까지 연설을 했습니다. (트럼프는 총 930회의 유세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 레벨을 유지하려면 연설 전략을 잘 짜야합니다. 해리스는 대본을 충실하게 읽고 감정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잡았고, 트럼프는 대본 상관 없이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주절주절 말하며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둘 다 다른 방식으로 효과적입니다. 해리스는 미디어에 최적화된 연설을 하고, 트럼프는 현장 청중에 최적화된 연설을 했습니다. 


선거 결과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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