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와 푸틴 회담 성사. 그리고 양복자켓에 대한 농담

2025-08-19


한국 시간 화요일 아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그리고 독일/영국/프랑스/핀란드 정상 등이 모인 회담이 비교적 순탄하게 끝났습니다. 트럼프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직후 이뤄진 회담입니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다음과 같은 합의점은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 이미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도네츠크, 루한스크)을 러시아가 가져가는 것으로 대체로 인정.
  • 우크라이나 나머지 지역에 유럽 여러 나라의 군대가 주둔해서 안전을 보장.


이런 내용을 가지고 향후 2주 내에 푸틴과 젤렌스키간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또 푸틴-젤렌스키-트럼프 간 3자 회담도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러시아는 아직 확인을 안 한 상태입니다. 


이 내용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이 합의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입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크라이나 입장: 현재 전황상 돈바스를 되찾는 것은 무리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또 돈바스 지역은 원래 러시아계 인구가 많고 친러시아 반정부 반군의 활동도 많았던 곳이라, 아쉽긴 하지만 앓는 이 빼는 것처럼 포기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주 언어도 우크라이나어가 아니라 러시아어입니다. 

돈바스 지역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습니다. 원래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스텝)지역이었고 17세기까지는 코사크족, 몽골족, 투르크족 등 여러 유목민족이 드문드문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고 18세기에 석탄이 발견되며 산업화와 인구 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도네츠크는 19세기 중엽 웨일스의 사업자 존 휴즈가 러시아 제국과 토지 사용 계약을 맺고 제철소를 만들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도 원래 '유즈코바(휴즈의 도시)'였습니다. 이후 볼셰비키 혁명 때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스탈리노(스탈린의 도시)로 불렸다가 1960년대에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2. 러시아 입장: 우크라이나에 나토 회원국의 군대가 들어오는 것은 껄끄럽지만, 나토 차원이 아니라 영/독/프 등이 개별 국가 자격으로 주둔한다면 눈감아줄 수 있습니다. 미국이 개입되지 않으면 러시아는 이들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돈바스 지역을 나토 지역과의 완충지대로 둘 수 있다는 것도 만족입니다.

애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이유도 러시아가 나토군과 직접 접촉하지 않을 수 있는 완충지대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고 돈바스가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3. 미국 입장: 트럼프 노벨 평화상 고고! 는 농담이지만 실제로 트럼프는 전쟁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미군 주둔이나 미군 희생 없이 종전을 이끌어내면 만족할 것입니다.


4. 한국에 주는 교훈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과 북한에게 큰 지정학적 교훈을 남깁니다.

강대국은 자기 바로 옆에 적대세력이 오는 걸 못 참습니다.

  • 미국은 1960년대 쿠바가 공산화되는 걸 막기 위해 미국 내에서 반군을 육성해 쿠바에 투입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또 러시아 미사일의 쿠바 배치를 막기 위해 핵전쟁까지 불사한 바가 있습니다. 자기 지역 내에 적대세력이 생기는 것을 절대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 소련(러시아) 역시 자기 주변을 다 우방국/꼭두각시 나라들로 둘러쳐서 안전지대를 확보하려 합니다. 구 동유럽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 그리고 북한이 그런 완충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 중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25 전쟁에 중국이 참전한 이유입니다. 중국은 아직 자기 나라도 가난하던 시절인데 굳이 어마어마한 병력을 갈아넣으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막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백만대군을 투입해 인해전술로 미군과 한국군을 몰아냈습니다. 육이오 전쟁 전사자 수 1위 국가는 한국도 북한도 아니라 중국입니다. 어마어마한 중국 병사들이 희생됐고 지도자 모택동의 장남까지 죽었습니다.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될 경우 중국 옆에서 나쁜 영향을 줄 거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 현재도 중국은 자신과 국경을 접한 나라들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걸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중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잘 보면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권위주의 정부가 독재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장려합니다. 이들이 외부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유입을 막아주는 장벽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 앞으로 혹여나 북한에 민주화혁명이 일어나거나 혹은 한국 주도의 흡수통일이 일어날 경우, 중국은 625 전쟁 때와 똑같이 행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완충지대를 만들려 하듯이, 중국 역시 북한을 침공해 자유민주화되는 것을 막고 북한 내 친중국 인사를 내세워 속국(puppet state)을 수립하려 할 것입니다.


  • 강대국들은 인접한 작은 나라들이 독립적으로 번영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번영하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 남아있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일례로 요즘 한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한국 선거에 개입한다'는 음모론이 많이 돌고 있습니다. 이 음모론 대부분은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은 루머인 경우가 많으나, 의심해 보는 태도 자체는 바람직합니다. 지역 내 강대국인 중국은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의 번영을 바라지 않으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싶어한다는 기본 방향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중국뿐 아니라 모든 제국의 본성입니다. 우리 한국도 만일 강대국이었다면 주변국들에게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말갈을 대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있었던 재미있는 장면 하나를 소개합니다.

지난 2월 젤렌스키가 워싱턴DC를 처음 방문했을 때, 어떤 미국 기자 한 명과 JD밴스 부통령이 그의 티셔츠 차림을 두고 비난을 했었습니다. 양복을 입어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이죠.

그래서인지 이번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양복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옷깃 있는 검정 셔츠와 검정 자켓 차림을 하고 등장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다들 수트(suit)라고 인정하고 좋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기자가 다시 등장해 말을 합니다. Real America's Voice라는 매체의 기자 브라이언 글렌(Brian Glenn, 56)입니다. 



  • 기자: 젤렌스키 대통령, 그 수트 입으니 엄청 멋있어 보입니다.
  • 젤렌스키: (웃으며 끄덕끄덕)
  • 트럼프: (기자를 보며) 나도 똑같은 얘기 했어요. (젤렌스키를 보며) 저 기자가 지난 번에 당신을 공격한 사람이에요.
  • 젤렌스키: (웃으며) 나도 기억해요
  • 기자: 제가 당신에게 사과합니다.
  • 젤렌스키: 당신은 그때와 같은 수트를 입고 있네요. 나는 바꿨는데. (다같이 웃음)




서양인들과 지내다보면 이들이 우리 한국사람들과는 약간 마인드가 다르다고 느끼곤 합니다. 서로 비난하고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웃고 친해지고는 합니다. 이해관계만 잘 맞는다면, 감정적으로 다투거나 체면이 상하는 것에 대해 우리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유머도 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서양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 사람은 뒷끝 없이 깔끔히 사과하고 또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여 흥미로웠습니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쿨하게 행동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외교를 하거나 국제관계를 분석할 때 인물 개개인의 캐릭터나 도덕관, 감정상태, 감정 대립 등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조금 다릅니다.


아무쪼록 우크라이나의 평화로 가는 길이 젤렌스키의 자켓처럼 매끈하고 순탄하기를 기원합니다.


- 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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