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특집] 표주록 - 17세기 조선인의 오호츠크해 방문기 (하편)

2025-08-08

문자도 모르고 쌀도 모르는 아이누족 사이에 떨어진 이지항과 7인. 과연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상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다음날 (음력 5월 15일, 양력 6월 29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방향타를 고치고 말린 생선을 얻고 물을 길어 배에 싣고서 표류하여 온 방향으로 똑바로 가, 요행히 우리나라에 도달한다면 살 것이고,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이리저리 표류하여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굶주린 일행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큰 참나무를 찍어서 방향타로 쓸 나무를 만들었다. 그걸 꽂을 구멍이 있는 널판을 어떻게 견고하게 만들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일단 배로 가져 가게 했다. 혼자 뒤에 처져서는 사방을 둘러보며 오는데, 시장기가 아주 심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곳곳에서 앉아 쉬었다. 마침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사람들이 먹는 수제비 같았다. 입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한 그릇을 주었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율무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재료를 구해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芭蕉)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堯老和那 오오우바유리대모백합)라 했다. 곧 뱃사람 하나를 불러 그 풀뿌리를 보이고, 또 생선장수 공중철을 불러 죽의 맛을 말해줬다. 한 그릇을 얻어서 두 사람에게 먹였더니 모두 속이 편하고 배부르다고 말하였다.

나는 “배 안에 있는 여행용 그릇 일부를 주고 그 풀뿌리를 얻어와서 죽을 쑤어 많이 먹자”고 했다. 곧 김한남이 그릇을 가지고 다른 뱃사람들과 함께 가서 그릇을 주니, 그 무리들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들이 뱃사람들을 이끌고 산기슭으로 가는데, 나도 함께 따라가 보니 그 풀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캐어다가 죽을 쑤어 각기 나누어 먹으니 다 배부르고 속이 편하였다. 닷새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늘 많이 캐어다가 죽을 쑤어 포식했다. 

배의 수리를 마치자 생기가 다소 돌았다. 한편으로는 풀뿌리를 캐고 한편으로는 건어물 남는 것을 구했다.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봤다. 이곳의 평원과 광야는 옥토 아닌 곳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과 두터운 둑이 있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단 한 자의 땅도 갈지 않았다. 대나무가 우거지고 갖가지 풀과 큰 나무로 이뤄진 숲에는 살쾡이ㆍ수달ㆍ담비ㆍ토끼ㆍ여우ㆍ곰 등의 짐승이 무수히 많았다. 육지에는 길이라곤 없고, 또 죽은 사람을 묻은 묘도 없었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으니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또 어떤 곳에 이르니, 마침 날씨는 바람이 불고 추웠는데 네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곰 가죽의 털옷을 입었고 하나는 여우 가죽을 입었으며 둘은 담비 가죽의 털옷을 입었다. 이들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로 짠 것이었다. 이들이 잡은 고기는 송어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였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 중에서 한 자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로 된 도포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사람들이 떼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우리 옷과 바꾸자고 한다. 몇 명이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뱃사람들은 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하였는데 나도 가지고 있던 옷을 다 주고 담비 옷 아홉 가지와 바꾸었다. 누가 내 갓끈에 단 수정 하나하나와 바꾸기를 청하기에 수정 두 알씩을 담비 가죽 두석 장씩과 바꾸었더니 받은 가죽의 수가 60장이나 되었다. 또 그들은 내 허리에 두른 옥(玉)을 가리키면서 붉은 가죽 일곱 장과 바꾸기를 청하고, 또 여우 가죽 열다섯 장을 가지고는 내 의복과 바꾸기를 청했다. 그 가죽의 품질이 크고 두터워 북피(함경북도 지방에서 나는 가죽)의 모양과 같기에 나는 허리에 찬 옥을 끌러줬다.


우리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식기와 물에 젖은 면 홑이불 여섯 벌, 보자기 두 장도 다 주고 바꾸었더니 수달피 석 장을 더 가져왔다. 그 물건들은 아주 커서, 한 장으로 털부채를 만들면 네 자루쯤 만들 수가 있다 하였다.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생겼다.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이 넘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남쪽인데 갈 길을 몰라 마음이 답답하고 낙심을 하고 있을 즈음에, 갑자기 북풍이 불어 왔다. 서쪽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쪽은 망망대해이고 동쪽으로는 육지였기에 동쪽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떠났다. 순풍을 만나면 돛을 가득 달아 빨리 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노를 저어 가다가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중간에 인가를 찾아 들어가 보면 다 역시 '그들' 무리였다. 하루도 머무름이 없이 장장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항해해 내려갔지만 그곳 사람들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지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다시 동쪽의 육지를 끼고 남쪽을 향해서 육지가 끊어질 때까지 갈 생각으로 갔다. 배가 몹시 고프고 목이 마르면 상륙해서 전에 죽을 쑤어 먹던 풀뿌리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건어물만 먹어서 잇몸이 솟아나오고 아파서 다들 고통을 느꼈다.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달랐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우리 배의 김백선이 일본어를 조금 알아 그들과 말을 통해 보았더니 완전히 통하진 못해도 간혹 아는 말도 있었다. 그들은 남쪽 촌락에서 온 왜인들이었고, 금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50여 명의 왜인 중 대장이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사람들을 보내어 우리를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쌀 서 말, 잎담배 다섯 뭉치, 장과 소금 등을 전해 주었다. 또 그들이 봉한 편지를 전해 주기에 뜯어 보니 모두 일본어(諺解)여서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글월의 밑에 다만 한자로 ‘송전인(松前人 마쓰마에 사람) 신곡십랑 병위( 新谷十郞 兵衞)’라고만 씌어져 있었다. 다소 기쁘고 마치 꿈을 꾸다가 놀란 듯하였다. 이 두 왜인과 같이 배를 탔다. 한편으로는 밥을 짓고 소금과 장으로 국을 끓였다. 그릇에 가득가득 담아 나누어 주었더니 우리 일행은 다 먹고는 곤해서 누워 있었다. 

5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포구에 정박했다. 거기에는 인가 일곱 채가 시냇가에 벌여있었다. 배에서 내려 왜인들과 같이 그 무리들의 집에서 잤다. 나는 조용히 김백선을 시켜서 그곳의 국명(國名)과 지명(地名)을 상세히 묻게 했더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종이에 붓으로 일본 글자로 써서 묻게 했더니, 국명은 ‘하이(蝦夷)’이고, 지명은 ‘계서우(溪西隅)’라고 했다.우리는 5월 초 9일부터 밥을 먹지 못했다가 29일에서야 비로소 밥맛을 보았다.

(*이지항이 관찰했듯이 과거 일본인들은 홋카이도를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으로 蝦夷라 쓰고 '에조' 혹은 '하이/카이'라고 발음했다. 1869년 메이지유신 후 이 땅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면서 '북쪽 카이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북가이도(北加伊道, 홋카이도)라 이름 붙이려 했다가 가운데 글자만 바꿔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라 부르게 됐다.)

(**계서우는 어디인지 모름)



다음날

"새벽에 배로 출발했다. 약 70~80리쯤 가니 해안에 초가집이 많이 있었다. 포구에 정박하니 계서우에서와 같이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의복과 기물들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에 있는 왜관의 집들과 같았다.

그 중 우두머리 왜인 한 사람이 나와 마주 앉아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을 잘하였다. 나는 속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살 길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 왜인이 한 장의 글을 써 보였다.

“나는 송전(마쓰마에)의 사람으로 이름을 신곡십랑(신타니 주로) 병위라 합니다. 모집한 군인을 이끌고 송전 태수의 명을 받아, 여기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3년 만에 한 번씩 송전부(관아)에 세금으로 황금 50냥을 바칩니다.”

(*병위는 군관 계급이다. 즉 신곡십랑은 마쓰마에 번 소속 사무라이.)


마쓰마에 번은 당시 홋카이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이들은 홋카이도 유일의 일본인이었다. 북쪽의 아이누족과 교역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가 다시 “처음 정박했던 곳은 어디었습니까?”라 묻기에, 나는 글로 써서 대답했다.

 “처음 정박했던 곳은 산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 듯하고, 바다를 자꾸 건너도 높은 산 하나만이 바다 한가운데에 솟아 있었는데, 그 끝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은 제모곡이라 했습니다.” 제모곡이라는 지명을 김백선으로 하여금 직접 발음해서 들려주게 했다.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칭찬하기를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하이(蝦夷, 에조, 아이누)의 지역입니다. 여기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송전에서는 합계 3천6백 리나 됩니다. 이 지역은 사방이 다 바다입니다. 우리나라의 아주 먼 북방의 지역입니다. 포구 마을로 이어져 있고, 땅의 폭은 어느 곳은 4백여 리가 되고, 어느 곳은 7백여 리가 됩니다. 길이는 3천7백~3천8백 리나, 혹 4천여 리도 됩니다. 살고 있는 무리들에게는 원래 다스리는 왕이 없고, 또 태수도 없습니다. 문자를 모르고 농경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해산물을 업으로 삼고 어탕(魚湯)만을 먹어 농사 짓는 이치를 모릅니다. 산에 올라 여우나 곰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서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아무렇게나 짜 옷을 지어 입습니다."

"이들은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물을 바치는 일이 없고, 다만 송전부에 익힌 전복을 매년 만여 동(1동 = 2천 마리)을 바치고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마을마다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 송전 태수의 앞에 나가 배알합니다. 그러나 언어가 우리와 같지 않고 짐승과 같아서, 무슨 일이 있으면 송전은 하이어 통역사를 별도로 두어 그 말을 익히게 합니다. 또 매년 한 번씩 송전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나쁜 짓을 했는지를 살피어 다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마을 안에 나이가 많은 자를 그 수장으로 정해서는 마을 안에 나쁜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잡아내어, 그들끼리 죄악의 경중을 논해서 손바닥 모양으로 만든 쇠매로 등을 서너 번 때리고 그치고, 더욱 죄악이 중한 자면 다섯 번을 때리고 그칩니다. 그 밖에 아주 심한 죄를 지은 자라면, 송전 태수의 앞으로 잡아다 놓고 죄를 논하여 알리고 참수하게 합니다." 

"그 무리들의 성질은 본래 억세고 포악하여 신발이나 버선을 신지 않은 채 산골짜기나 우거진 숲속을 돌아다닐 수가 있으며, 가시덩굴을 밟고 넘어 높은 언덕 위에서 여우나 곰을 달려가 쏘아 잡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서 바다에서 큰 고래를 찔러 잡고, 눈과 추위를 참아 습한 땅 위에서 자도 병에 걸리지 않으니 실로 금수와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옛날 남방 사람의 상선이 그곳에 표류되었는데, 이 무리들은 선원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우리 송전에서는 그 모살했던 무리들을 적발해서 부모ㆍ처자ㆍ부족원들을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근래에는 사람 죽이는 짓은 없어진 듯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이번에 그곳으로 표류했다가 빠져 나올 수가 있었으니, 복 받은 분이라 할 만합니다."

"또 여러분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보다 더 먼 곳에는 별도로 갈악도(羯惡島, 가라후토/사할린 섬)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과 같고, 모발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시라도 하이족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오래 사실 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들이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었다.


엿새째 되는 날

십랑 병위는 우리가 타고 온 배를 정돈시키고 여러 왜인을 거느리고 나섰다. 그들 중에는 고산간 병위(高山間 兵衞, 타카야마 아이다)라는 자도 있었으니, 하이어(蝦夷語)의 통역사였다.

7월 1일, 우리는 송전 태수를 알현하기 위해 배를 띄웠다. 나는 배에 있는 동안 하이어 통역사에게 글을 써 보여주며 내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현지어와 물정을 물었다.

  • “하이족이 말하는 ‘마즈마이’란 무엇입니까?”
    → “그건 송전(마쓰마에 번)을 뜻합니다.”
  • “‘앙그랍에’는?”
    →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 “‘빌기의’는?”
    →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 “‘악기’는 무엇입니까?”
    → “물을 뜻합니다.”
  • “‘아비’는?”
    → “불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들을 왜어와 견주어 보니 아주 딴판으로 달랐다.


나는 오랫동안 표류하는 배 안에서 지내고 때로는 들판에서 자면서 무더위에 지치고 시달렸으며, 굶주림과 갈증으로 몸이 쇠약해졌다. 밤이면 모기에 물리고 낮에는 벼룩과 이가 들끓는 고통 속에 기운이 다 빠졌다. 밤에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낮에는 순풍이 불면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순풍이 없으면 포구에 배를 정박하고 대기했다. 정박한 곳들에는 가끔 마을이 있었지만 대부분 하이족이 사는 집들이어서, 그곳의 눅눅한 기운과 들끓는 벼룩 탓에 배 위 생활보다도 못했다.

사흘 동안의 항해 후 역풍을 만나 다시 포구에 정박하였는데, 이미 상선을 타고 온 왜인 무리가 먼저 와 있었다. 장사를 하는 왜인 30여 명 가운데 우두머리 한 명이 나와서 우리가 탄 굴금선(금을 캐는 배)을 맞이하였다. 그 왜인의 앞에서 여러 왜인들이 마루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사정을 아뢰었고, 십랑 병위만이 마루 위로 올라가 절을 주고받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앉아 술과 생선을 정중히 내놓고 극진히 대접하였다.

내가 글로 그의 이름을 묻자 그는 영목호차 병위(스즈키 베쓰기, 鈴木戶次 兵衛)라고 하였다. 십랑 병위가 나에게 시 짓는 재주가 있다고 전하니, 그 왜인이 나에게 시 한 수를 간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칠언소시(七言小詩)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고, 몇 번이나 시를 다시 읽으며 크게 칭찬하였다. 이는 왜인들이 시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역풍이 연달아 불므로 그곳에서 머문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배 위에서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지난날과 같이 내 집에 있으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로하느라고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내는데, 평소와 꼭 같게 느껴졌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다음날에는 순풍을 만나서 해안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사흘이 지난 뒤, 큰 바다를 하나 건너서 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은 석장포(石將浦, 현재의 슷츠로 추정)라 불렀고, 그 바다는 하이국과 왜국의 경계를 이루는 바다였다."

(* 이지항은 은근히 자신의 글솜씨를 자랑하면서도 '왜인들이 시를 잘 몰라서 그런다'고 겸손을 부렸다. 조선 양반 답다..)


 이지항이 방문한 17세기 마쓰마에번은 상단 왼쪽 2번째에 해당하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뒀다.


7월 10일 

남풍이 세게 불고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여러 날 배를 타고 오래 바다 위에서 지내 피로가 너무 심했다. 고향 소식은 들을 길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해서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십랑 병위가 나의 슬퍼하는 기색을 보고서는 금 1전(錢)을 꺼내어 좋은 술 한 통을 사다가 나를 위로하여 걱정을 풀게 하였다. 그래서 큰 잔으로 세 차례 듬뿍 마셨더니 조금 뒤에 기분이 약간 풀렸다.

하지만 바다 건너 타국 땅에 표류한 근심은 쉽게 가시지 않아, 잠시 기분이 나아졌다 해도 향수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주변에 모인 여러 왜인들과도 말이 통하지 않아 서로 묻고 답해도 귀머거리처럼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김백선이 그나마 일본어를 조금 알았지만, 나와는 다른 배에 타고 있어서 때론 앞서고, 때론 뒤따라가며 서로 만나 얘기할 기회도 없어 더욱 답답했다.


7월 23일

우리는 마침내 송전부(松前府)에서 북쪽으로 백 리(약 40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그 지역 이름은 예사치(曳沙峙, 현재의 에사시 江差町)라고 불렸다. 그곳은 큰 마을이었고, 국경 지역을 지키는 장교 한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장교는 넓은 관사를 지어 살고 있었으며, 호위병들이 늘 곁을 지키고 있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마을에는 약 500호의 백성이 살고 있었고, 장이 서는 곳에는 온갖 물산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녀의 옷차림은 매우 화려하고 특이했으며, 사람들의 인상은 똑똑해 보였고, 여자들은 특히 아름다웠다. 우리가 도착하자 양쪽 길가에 구경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그들은 우리 같은 사람을 처음 본다고 모두 신기해하며 반가워했다.

장교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나를 맞이했고, 정중히 절을 하며 인사했다. 그와 마주 앉아 식탁 위에 각종 기이한 안주들을 낭자하게 늘어놓고, 꽃무늬 술잔에 청주를 따라 가며 무수히 마셨다. 김백선과 다른 선원들은 바깥 대청에 따로 앉히고,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들을 따로 접대하게 하였다.

장교는 붓과 벼루, 좋은 종이(모면지)를 가져와 우리 사정을 글로 써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우리가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정성껏 적어 건넸고, 그는 그 글을 봉함하여 송전 태수에게 급히 보고하게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흘간 머물렀는데, 매 끼니마다 받은 대접은 아주 풍성하고 훌륭했다. 며칠 후, 송전 태수가 보낸 신하 한 사람이 육로로 사람들을 이끌고 도착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장교는 사람과 말을 정비하여 우리의 표류선을 정돈하고 왜인들을 태워서 바닷길로 송전부로 보내는 한편, 나는 가마에 태워 육로로 이동시켰다. 

길은 험했다. 산은 높고 마을은 깊었으며 초목은 우거지고 오가는 길은 매우 험악했다.



7월 26일

송전까지 70리쯤 되는 데에 도착해서, 어느 마을의 집을 숙소로 정했다.


7월 27일

우리는 새벽에 다시 송전을 향해 길을 떠났다. 송전까지는 대략 10리 정도 남은 지점에서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약간의 술과 밥을 내왔다. 그 뒤 나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갖추고 관청이 있는 송전부로 들어가던 중이었는데,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봉행(奉行, 관아의 문관) 왜인은 도중에 여러 차례 글을 전달하며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5리쯤 더 가자, 여러 사람이 우리를 호위하고 있었고 밤길을 밝히기 위해 촛불이 환히 밝혀졌다. 성문 바깥에 이르자, 봉행 왜인 10여 명이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좌우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칼을 찼으며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맞아 절하며 읍했고, 계속해서 우리를 호위하여 드디어 송전부 관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푸짐한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를 호위하던 봉행들이 맞이하여 나를 동쪽 자리에 따로 앉혔으며, 그들은 서편 자리에 앉았다.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은 바깥 대청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앉게 하였다.

그들은 김백선을 불러 이렇게 전했다.

“태수께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또한 글 한 장을 건네주었는데, 그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다.

  • 이번 항해에서 당신들은 어떤 이유로 배를 타게 되었으며, 어디로 가려다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까?

  • 며칠 동안 표류한 뒤에 우리 국경 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 바다에서 일본 상선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 조선에서 출항한 날짜는 언제였으며, 표류한 날수는 몇일입니까?

  • 이 선달, 김 첨지라는 이들은 어느 고을 사람이며, 성명과 관직, 품계는 어떻게 됩니까?

  • 조선에서는 불법(불교)을 믿습니까? 신(神)에게 제사를 지냅니까? 유도(유교)를 중시합니까? 예수(야소, 耶蘇)라는 자의 교리가 널리 퍼지고 있습니까?

  • 표류 중 하이족에게 해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까?

  • 혹시 이 여정에서 필요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말해도 좋습니다.

이에 나는 정중하게 답변을 썼다.

"삼가 일본국 송전 태수 각하께 아룁니다. 저는 조선 경상도 동래부에 사는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한 자입니다. 개인 용무가 있어 강원도 원주의 관청에 가려던 길이었습니다. 지난 4월, 동래 어부들이 배를 빌려 강원도 해안 쪽 고을로 가고자 하기에, 저도 그 배에 함께 탔습니다. 좌해(동해)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중, 강원도와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4월 28일 미시 무렵 바다에서 갑자기 횡풍을 만났습니다. 배의 후미가 부서져 조종이 불가능해졌고 바다는 어두워져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채 바람에 떠밀리게 되었습니다. 수일이 지나면서 양식과 식수가 모두 떨어져 우리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5월 12일, 다행히 북쪽 땅에 정박할 수 있었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귀국의 백성이 아니었기에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고, 문자를 아는 이도 없었으며, 곡식을 먹는 이들도 아니라 겨우 어탕 한 그릇을 받아 연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가 오던 길에서 귀부의 사람인 신곡십랑 병위(新谷十郞兵衞)를 금 캐는 채금장에서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저희가 감히 귀국의 땅을 침범한 것은 본디 큰 잘못입니다. 하지만 인명을 살피는 마음으로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면, 이는 훌륭한 선업이 되어 큰 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감히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덧붙여 다음과 같이 신상을 밝혔다:

  • 성은 이(李), 이름은 지항(志恒), 자는 무경(茂卿), 관호는 선달입니다.
  • 성은 김, 이름은 백선(白善)입니다. ‘첨지(僉知)’는 나이 든 이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 공 씨와 김 씨는 무사로서 상업을 겸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부나 선원들입니다.
  • 우리나라에는 불교를 섬기는 풍속은 없습니다. 다만 산속에서 도를 닦는 중들이 암자에 머물며 불경을 읽을 뿐입니다.
  • 신을 섬기진 않지만, 돌아가신 부모나 조부모, 아내의 생일과 기일에는 목욕재계하고 술과 고기를 차려 제사를 지냅니다.
  • 사람들은 유교를 따르며, 공자·맹자 같은 성인과 유학자들의 위패를 향교에 모시고 제사를 지냅니다.
  • 식년(3년에 한 번)마다 과거 시험을 열고 문무 양과에서 갑·을·병 세 등급으로 인재를 선발합니다.
  • 야소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습니다.
  • 하이족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전혀 없습니다.
  • 여정 동안 받은 접대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십랑 병위라는 분은 채금장에서 여러 날 우리를 대접하느라고 식량과 반찬을 허비했는데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한이 됩니다. 또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표류 중 옷이 모두 젖어서 하이족들의 털옷과 바꾸어 입었기 때문에 변변한 옷차림이 없어 민망할 따름입니다.
  • 그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답서를 받은 봉행 왜인 중 한 명이 그것을 들고 태수 앞으로 들어갔다. 곧 여러 왜인들이 우리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고, 바깥문에는 3명을, 안쪽문에는 2명을 배치하여 문을 지키게 했으며 3일마다 교대하도록 했다. 우리는 어지럽게 차려진 상 위에 술과 국수 등을 후하게 대접받고 잔치를 마쳤다.

6월 초하루(6월 30일)에 채금장을 떠났던 배가 지난 25일에 송전부에 들어왔고 중간에서 4~5일 머문 적이 있었다. 뱃길로 20여일을 왔으니 과연 2천여리의 거리였다.


(*이지항은 송전 태수에게 자신이 강원도 원주에 업무를 보러 가던 일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체면상 그런 것 같다.)

(* 송전 태수는 왜 예수교에 대해 물었을까? 일본은 일찌기 1550년에 가톨릭이 전파됐는데 곧 막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 탄압을 피해 마쓰마에 번까지 숨어들어온 106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1639년 처형당하는 '에조 키리시탄' 사건이 있었다)


송전(마쓰마에) 성


다음날(7월 28일)

아침이 되자, 송전 태수는 봉행 한 사람을 보내어 나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였다. 그 봉행은 글 한 장을 내게 전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뜻은 잘 받들어 읽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을 조선으로 호송하지는 못하지만, 추운 계절까지 체류하게 하여 건강을 해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부하 관리에게 명하여 관련된 일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채금장에서 도움을 받은 일에 대해서도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 사람 역시 우리나라 백성입니다. 이곳에서 머무는 기간이 몇 달이 걸린다 하더라도 굶주릴 걱정은 없을 것이니, 다만 병이 나지 않도록 숙소에서 몸을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적절한 때가 오면 귀국을 서두를 것이니 부모님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견뎌 주십시오.”

이 편지는 내가 먼저 드린 답서에 대한 회신이었다. 그 봉행 왜인의 이름은 고교천우위문(高橋淺右衛門, 다카하시 아사우에몬)이라 했고, 글자를 조금 알았기 때문에 글로 소통이 가능했다. 가끔은 김백선을 통해 말로 전하기도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태수는 다시 시종 한 사람을 보내어 나를 불렀다. 나는 곧 의관을 정갈히 갖추고 그 시종과 함께 태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태수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약간 몸을 일으켰고, 나에게 절하라고 하였다. 태수는 손을 들어 답례하였다.

잠시 물러나 동쪽을 향해 앉아 있으니, 다양한 생선과 과일을 한 그릇에 가득 담아 가져왔고 차와 술도 몇 순배 내왔다. 그렇게 잠시 대접을 받고 자리를 물러났다. 이어서 태수로부터 또 다른 짧은 글 한 장이 도착했는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편히 쉬십시오.”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에는 봉행들이 앞에서 나를 인도해 주었다. 길가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송전 태수의 위세와 위엄, 그리고 이 고을 안의 인물들과 시장의 물산이 풍성함은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보다도 백 배는 더 나은 듯하였다. 태수의 자리가 세습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태평하고 부유한 것이 아닐까.

(*조선은 중앙집권체제라 왕이 각 지역의 태수(부사)를 임명했지만 일본은 대대로 번주 가문이 세습했다)


정오 무렵, 태수는 봉행 고교천우위문을 보내어 나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전해주었다. 검은 명주 3필, 솜 5조각, 옥색 명주 1필, 푸른 명주 1필, 분지(흰 무리풀 종이) 10묶음, 일반 종이 5묶음이었다. 또 김백선 등 세 사람에게는 흰 모시 2필씩과 일본식 옷 한 벌, 분지 3묶음, 일반 종이 3묶음씩을 주었고, 선원들에게도 무명 2필과 일본 옷 한 벌, 일반 종이 3묶음씩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이에 대해 정중히 사례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보내주신 물품은 모두 잘 받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중 검은색 명주는 저희 조선에서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양을 보내주시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옥색과 푸른 명주 2필, 솜 5조각만으로도 두꺼운 옷을 지어 충분히 추위를 막을 수 있으니, 검은 명주는 사양하고자 돌려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려받지 않았다. 나는 선물 목록을 써서 십랑 병위의 거처로 보냈으나, 그 역시 받지 않아 억지로 그의 집에 두고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글도 전했다.

"신곡십랑 병위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며칠 사이 건강히 잘 계시는지 문안드립니다. 병위님을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습니다. 저는 숙소에서 무사히 지내고 있고, 몸에도 탈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존경하는 병위님께서 각별히 살펴주신 덕이라 생각합니다. 다 죽을 뻔했던 저희를 살려주신 은혜는 산과 같고, 조국에 돌아가서도 죽는 날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태수께서 보내주신 명주 가운데 넉넉하게 입을 만큼 충분한 분량이 있었기에, 검은 명주 3필을 되돌려드리오니 부디 제 뜻을 받아주시고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송전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하루 세 끼 밥과 국, 술을 정성껏 대접받았고, 가끔 따로 먹을 거리도 보내주어 오래 굶주렸던 몸이 점차 배부르고 편안해졌다. 하루는 태수는 시왜를 보내 문안을 전하면서, 함께 당지(唐紙, 고급 중국 종이) 열 장을 보내며 김백선을 통해 이렇게 전해왔다.

“존좌께서는 예사치에서부터 이 고을까지 육로로 오시며 풍경을 보셨을 터이니, 그 감상을 시로 지어 보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던 길에서 떠오른 대로 시 여섯 수를 연이어 써서 보내드렸다. 전해 듣자니, 태수는 평소 시 짓기를 좋아하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도 잘 그리며, 항상 에도에서 온 서류(瑞流)라는 중과 함께 시와 그림에 관해 토론을 나누고 숙식까지 함께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내가 보낸 시를 태수는 그 중과 함께 감상하고, 곧 차운(次韻, 시의 운자를 맞추어 화답하는 형식)하여 시를 보내왔다. 그 시는 이러하다.


봄이 와도 머리에 흰 눈 쌓였다 말하지 마소 / 莫言春到雪蒙頭
고향길 먼 데 있는 그대가 딱하이 / 覊旅憐君鄕路悠
소ㆍ이(蘇李)가 옷깃을 나누매 다시 만나기 어려워라 / 蘇李分裳難再遇
하량의 한 번 이별함이 이미 천 년일레라 / 河梁一別已千秋
명리(名利)에 떠들썩함이 싫어서 / 應厭利門名政喧
편주로 물결을 타고 도화원 묻네 / 扁舟駕浪問桃源
돌아와 다시 집사람 만나 얘기하면서 / 歸鄕又遇家人語
손잡고 이게 꿈인가 의심했지 / 把手猶疑是夢魂
서풍 따라 만 리를 떠 왔는데 / 漂來萬里任西風
우리나라에 들어올 것 어찌 생각했으랴 / 流到豈思入我邦
여관이 적막한데 그 누굴 벗삼으랴 / 旅館寂寥誰共伴
내 마음 알아주는 건 한 쌍 백구인가 하노라 / 知心只有白鴟雙
한 가닥 경계는 옛 풍연(風煙) 깨뜨리는데 / 一條界破舊風煙
폭포 소리 우레처럼 울려 백천이 불어나누나 / 瀑韵轟雷漲百川
시 지은 이, 적선의 후예이리라 / 應是題詩謫仙後
글 기운이 백 장으로 하늘까지 닿으니 / 文瀾百丈直滔天
찬 달빛 저녁마다 처마를 비춰 주고 / 寒月暎簷夜夜明
쓸쓸한 저 바람은 또 다듬이 소리를 보내 줌에랴 / 風悲況又送砧聲
청등을 선창 아래에 꺼지도록 태우니 / 靑燈結盡禪窓下
시 읊느라 새벽까지 이르렀음을 알겠네 / 想見吟詩到曉更
인간의 일이 모두 제대로 안 풀린다 / 諦渙人間萬事非
만났다가 이별함을 어찌 생각했으랴 / 豈圖相遇又相違
봄바람에 이제 돛을 달고 가지만 / 春風縱今掛帆去
구름산의 중과 벗한 것을 잊지 마시오/ 莫忘雲山伴衲衣


이후 태수는 다시 좋은 종이를 보내며 내게 글씨를 써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당나라 시의 구절 세 줄을 초서체로 써서 보냈는데, 그들은 글씨체가 어떤지는 모르고 획이 자유롭게 흩어진 모습만 보고 무척 칭찬했다. 태수의 칭찬 소문이 퍼지자 그 지역의 유지들이 당지를 들고 찾아와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나는 오는 사람마다 오언시나 칠언시를 종이의 크기에 따라 써주며 위로하였다.태수는 사람들이 글씨를 많이 청한다는 얘기를 듣고,  흰 토끼 털로 만든 붓 세 자루(대·중·소)를 골라 보내주었다. 그래서 내가 송전에 머문 48~49일 동안 종이에 쓴 글이 거의 백 권에 달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문방구를 드려 보답하고 싶지만, 앞으로 에도로 가는 길에서 혹시 수색을 당할 경우 우리나라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준 자가 처벌받습니다. 그래서 대신 물고기와 술을 드려 사례합니다.”



8월 26일

에도의 관백(고위 관료)으로부터 나를 육로로 데려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에 태수는 별도로 세 명의 가신을 보내어 술로 위로하며 선물을 전해주었다. 푸른 명주 2필, 흰 베 2필, 풀솜 5조각, 옥색 명주로 만든 요 1벌, 독수리 깃털 1매, 금화 2전, 떡, 국수, 생선, 술 등이었다. 함께 전달된 태수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명주와 솜은 선달께서 강호로 가는 길에 입으실 옷을 지으시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독수리 깃과 황금은, 무관이신 선달께서 띠 장식으로 사용하시라는 뜻입니다. 드리는 물건 하나하나에 제가 선달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나머지 음식들은 일행들과 나눠 드십시오.”

나는 독수리 깃, 금, 음식만 받고 명주는 사양하였다. 하지만 가로는 명주도 함께 두고 갔고, 조금 뒤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태수의 말을 전했다.

“떠나는 손님에게 노자를 드리는 것은 예법입니다. 하물며 외국에서 표류한 분에게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사양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나는 이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노자로 주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자 가신은 기뻐하며 돌아갔다.


8월 27일

태수는 다시 천우위문(淺右衞門)을 시켜 일본식 옷 7벌과 청색 무명베로 만든 요 7채를 보내왔다. 그는 함께 전달한 글에서, "떠나는 여러분이 도중에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드리는 것이니, 각자 나누어 입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봉행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각 사람에게 이 옷과 요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까지 서류(瑞流)라는 스님이 자주 시를 지어 나에게 보내왔기에 나도 이에 화답하여 시를 지어 보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스님이 직접 나를 찾아와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존좌께서 이곳 송전부에 머무신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만, 저는 태수와 함께 지내느라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주고받은 시들을 통해 마음과 정은 이미 오래전에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실은 에도에서 온 사람으로 이곳 송전에서 산 지가 어느덧 70년이 되었기에, 낯선 땅에 사는 이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존좌께서 바다에 표류된 지 오래되셨으니 고향의 가족들께서는 아마도 극심하게 걱정하고 비통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곧 돌아가실 날이 가까웠기에 잠시 틈을 내어 직접 찾아뵙는 것입니다. 부디 모든 복을 받으시고 무사히 귀국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국에서 늙어 이렇게 남게 되니, 아마 이 생에서 다시 뵙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슬프고 아쉽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뒤 곧바로 시 한 수를 따로 지어 나에게 주고는 깊이 절하며 물러갔다.


올 때엔 서계로 정 더욱 화목했는데 / 來時書契情尤睦
오늘엔 기쁨과 근심이 얽히고 설키누나 / 今日喜愁共有依
채 뵙지 못하고 님 보내니 / 未謁芝眉送錦袖
내 혼은 꿈마다 그대 따르리 / 別魂夢結夜追衣


서로 만나기 전에 그 중이 지어 보낸 시는 이러하다.


흐린 구름 걷히고 늦게 맑으니 / 嵐雲收盡晩晴快
유유히 명월(明月) 보고 시 지어 보세 / 吟興悠悠對月明
홀몸 쓸쓸한 객 저녁에 앉았으면 / 一半秋客待夜夕
온 혼백이 속세의 정 씻겠네 / 十分魂魄洗塵情
달빛이 하늘 가에 떠오르면 잠자던 까마귀 지껄이고 / 光浮天際宿烏噪
그림자 물결에 비치어 어별을 놀라게 하네 / 影暎潮瀾魚鱉驚
궁벽한 땅 바닷가엔 시 짓는 벗 적어 / 地僻海隅詩友少
홀로 굽은 난간에 의지하여 삼경을 지내노라 / 獨憑曲欄過三更
백운 속 암자(菴子) 있되 / 禪菴住在白雲層
산림 막혀 못 가겠고 / 臝得山林抱不能
밖의 송창엔 □달 비치는데 / 外有松窓□有月
불경 송독하고 나서 가물거리는 등불 마주하네 / 梵凾誦罷對殘燈
가까운 나그네 집 밝은 달빛 속에 바라보고 / 近望旅軒對月明
포구 기러기가 사람에게 알리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 忍聞浦鴈報人聲
그대는 나그네 시름에 잠 못 이루시겠지요 / 愁察客霄夢難結
나 역시 그대 그리워 한밤을 새운다오 / 我亦思君到曉更
그대가 삼도에 이른 것은 가을날이었지요 / 君到秋霄三島天
귀한 손님이 신선 되었나 상상했다오 / 鳳客想好化神仙
황연히 잠을 깨니 내 곁에 와 있어서 / 恍然夢覺投吾夕
낭랑한 읊조림이 책상 앞에 울리누나 / 瓊韻金聲響几前


우리들은 술을 몇 잔씩 들고 헤어졌다.


8월 29일

태수는 다시 천우위문을 시켜 약간의 물고기 안주와 술을 보내어 이별을 위로해 주었다.


8월 30일

아침식사를 한 뒤, 배를 정비하여 선창에 대어 놓고 출발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때 태수는 시종을 보내어 나만을 공관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전하였다. 태수는 직접 공관의 대청 마루 위로 나와 나를 맞이하였고, 서로 서서 정중히 절을 주고받았다.

태수는 작은 술상을 차려 봉행(奉行)들에게 내어주며, 술잔을 올리고 떠나는 길을 위로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윽고 태수는 방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서로 말은 없이, 두 손을 이마에 대고 깊이 숙이며 이별 인사를 나누었다. 봉행들과는 잠시 함께 자리에 앉아 몇 잔의 술을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하고 배가 있는 선창으로 향했다.

배에 올라 돛을 가득 펼쳐 달고, 한 폭 좁은 바다(쓰가루 해협)를 새처럼 가볍게 건너갔다. 건너간 곳은 진경군(津軽郡, 현 아오모리현 쓰가루)이었다.

우리는 바닷가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지방 관청에서 공식적으로 나와 우리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8월 31일

아침이 되자, 송전부에서 파견된 다섯 명의 봉행(奉行)이 나를 데리러 와서, 가마를 정돈해 들여오고는 타라고 권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가마를 메게 하였다. 여정을 따라 곳곳의 고을 경계에서 일행은 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으며, 길 안내를 맡은 나장(羅將)이 여섯 명, 심부름하는 사환들이 무수히 따라붙어 마치 우리나라의 별성 행차(왕실의 행차)와도 같은 위엄이 느껴졌다.

나는 봉행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본래 우리나라에서도 가마를 탈 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 하물며 표류해온 처지입니다. 이런 폐를 끼치는 것은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겨져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말 한 필을 정해주시면, 말 위에서 두루 경치도 구경할 수 있고 마음도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왜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은 관백(關白)께서 '잘 호위하여 데려오라'고 내리신 명령이고, 태수께서도 정식으로 분부하신 사항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진경군(津軽郡, 아오모리), 남부현(南部縣, 이와테), 선대부(仙臺府, 센다이), 오주(奧州, 오슈), 목신우군(牧信友郡, 후쿠시마로 추정) 등 다섯 고을이었다. 각 고을은 북쪽 성문에서 남쪽 성문까지 거리가 20리에서 30리에 달하며, 사람의 수와 물산의 풍요로움은 우리나라 경성(서울)보다도 배나 많았다.

일정은 각 고을마다 6~7일이었고, 전체 여정을 계산해 보니 모두 27일간의 길이었다.



9월 27일

비로소 강호(에도/도쿄)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대마도주(대마도 태수)의 처소로 이관되었다. 도주가 우리를 그대로 대마도로 내보내려고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데리고 오는 봉행 및 모든 왜인을 고르는 동안에 저절로 5~6일이 되었다.

(당시 일본 전국 각 번의 태수들은 수도인 에도에 처소를 하나씩 두고 있었다. 일본 막부는 조선의 하급관리인 이지항을 굳이 면담하지 않고 곧바로 돌려보냈다.)



9월 30일

술과 국수를 간단히 차려 한 방에 모두 모은 뒤, 세 명의 봉행(首奉行)에게 작별 인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상급 왜인 5명과 하급 왜인 10명이 우리 일행을 인솔하여 대마도를 향해 출발하게 됐다. 이전에 북쪽에서부터 인솔해 왔던 예에 따라 나는 가마에 태워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타게 했다. 하루에 백 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가마를 메는 인부와 말은 각 고을에서 번갈아 제공했으며, 여비는 저쪽에서 스스로 부담하며 매 참마다 지불하고 먹을 것을 샀다. 보아하니 그들이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할 때, 각 읍에서 제공해야 하는 여비는 돈으로 징수하는 방식인 듯하였다. 그러나 그 내막은 숨기고 솔직히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들의 간사한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이전까지는 일본에 대해 좋은 말만 하다가, 이제 조선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험담을 하는 이지항 센세)


10월 17일

대판성(오사카성)에 도착했다. 사흘 동안 머물렀다가, 오사카항(五沙浦)에서 일본 배를 타고 바닷길로 출발했다.

항해 중 지나간 해안 지역은 병고보(兵庫堡, 효고 현)ㆍ하관(下關, 시모노세키)ㆍ적간관(赤間關, 아카마가세키)ㆍ지도(芝島, 시마지마)ㆍ승본도(勝本島, 가쓰모토)ㆍ일기도(壹岐島, 이키)ㆍ팔도(八島, 야시마)ㆍ단포(壇浦, 단노우라) 등이었다. 


12월 14일

대마도에 도달해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송전에 버려두었던 표류선을 기다렸으나 마침내 오지 않았다.

(* 배는 2년 후인 1698년에 왜인에 의해 돌아왔다고 함)


다음 해 2월 2일

또다시 일본 배를 탔다. 우리와 함께 파견될 왜인을 정하고 문서를 받았다. 그러나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항구마다 들러 머물러야 했다.


3월 5일

비로소 순풍을 만나 우리나라의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 왜관에서 검사할 수 없으므로, 날이 새기를 기다려 검사를 받은 뒤에야 나왔다. 우리는 가지고 온 짐을 우리와 같이 표류했던 울산 도포(桃浦) 사람 박두산(朴斗山)의 배에 옮겨 실었다. 부산진(釜山鎭)의 영가대(永嘉臺) 앞에 정박하여 배에서 내렸다.

그림 중앙 바위 위에 세워진 건물이 부산진 영가대. 조선통신사 행렬에 소속된 화가가 그린 그림이다. 영가대는 일제 때 사라졌다.


표류했던 사람들이 탄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부산첨사가 듣고는, 우리를 불러 경위를 진술하라고 했다. 부산성 밖에 있는 기패관(旗牌官) 정진한(鄭振漢)의 집에 당도하니 이 때가 밤 10시 쯤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밥을 지어 주었다.

비로소 집에서 두 아들과 종 잉질메가 왔다. 이들은 형님이 지난해 6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정신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관아로 들어가 진술을 했다.

 

- 표주록 끝




어떠셨나요?

지금까지 1696년부터 1697년까지 홋카이도(당시 우리가 부르던 이름으로는 하이국)을 다녀온 이지항의 '표주록' 전문을 읽어봤습니다. 하멜 표류기와 마찬가지로 시간 순서로 적은 기록문 형식이라 읽기에 편리하고 팩트와 의견이 구분된 책이었습니다.


표주록을 읽어보면, 조선이 하이(아이누)족과 교역할 경우 동물 털가죽으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정부가 조금이라도 상업에 대한 뜻이 있는 나라였다면 이지항의 보고를 받고 홋카이도에 무역선단을 파견했을 것입니다. 또 마쓰마에 번과 마찬가지로 조선과 가까운 쪽 해안에 상업 거점을 마련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항해술도 쇠퇴한데다가 국제 무역에 대한 의지도 사라진 상태였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홋카이도는 표주록 이후로도 150년 넘게 무정부지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추운 기후라서 문명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869년 메이지유신 때에 비로소 일본에 스르르 편입됩니다.

이지항 일행에게 어탕을 주며 목숨을 유지하게 해준 하이족(아이누족) 역시 1871년 일본 호적을 부여받고 일본인의 일부가 됐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피도 문화도 본토인들과 섞여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 OR


오호츠크해

3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