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29년 전, 아직 일본에 편입되지 않고 아이누족의 땅으로 남아있었던 홋카이도에 다녀온 조선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록을 살펴봅니다.
지난 5월 OR 편집자는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그 여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방송 중에 제가 '조선시대에 우리가 먼저 홋카이도에 진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는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기록을 찾아보니 실제로 임진왜란 100여년 후인 1696년에 홋카이도 북쪽, 일본 최북단의 오호츠크해까지 구경하고 돌아온 조선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지항. 흔히 '이선달'로 불리는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홋카이도까지 표류했습니다. 그리고 도쿄(강호), 오사카(대판),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한 이야기를 '표주록(漂舟錄: 표류하는 배의 기록)'이라는 글로 남겼습니다.
조선 양반 이지항은 당시 일본 사람들도 잘 몰랐던 홋카이도와 오호츠크해에 대해 어떤 관찰을 했을까요? 2회에 걸쳐 현대어로 바꾼 전문을 게재합니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표주록 번역본(문선규, 1974)을 사용했습니다. 누구나 보실 수 있습니다.
표주록 (1696)
배경설명
표주록이 나온 1696년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약 1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당시 조-일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그래도 양국간 교류는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조선은 부산포에 '왜관'을 두어 대마도 상인들이 교역을 할 수 있게 했고, 일본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보내서 일본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1682년에 통신사가 파견됐었으니 일본 현지의 소식을 들은지도 14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또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는 교역이나 소통이 없었습니다.
필자 이지항(李志恒)은 동래(현재 부산시 동래구)에 살던 사람으로 당시 50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들 둘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결혼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젊어서 무과에 급제해서 서울에 올라왔고 수어청(수도방위사령부)의 군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 동래에 내려와 상을 치렀습니다. 조선시대는 요즘처럼 3일장만 치르고 끝내는 게 아니라 몇 년을 무덤을 돌보며 보냈습니다. 그도 고향에서 느긋하게 놀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안식년이네요.
그러던 4월 중순, 이지항은 경북 영덕 쪽에 볼일을 보러 간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동래에서 말을 타고 부산포(부산항)로 내려간 다음 거기서 생선장수들의 배를 얻어 탑니다. 타고 온 말은 노비에게 쥐어 집으로 돌려보내고요.
조선 말기 부산포의 모습
사실 경남 동래에서 경북 영덕까지는 직선거리 150km 정도 밖에 안 되고 중간에 높은 산도 없으니 당시 사람들의 걸음 속도로 며칠 안에 커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지항은 군인이니 걸음도 빨랐을 것이고 말도 있으니 더 빨리 가죠.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인지 굳이 불편하게 바다에서 배를 탔습니다. 시종도 없이 혼자서요. 좀 수상하쥬? 쌀 서 말(5 x 3 = 15kg)과 돈 두 냥도 가지고 탔으며, 뒤에 나오겠지만 정력제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추측은 하지 않겠습니다...
생선장수 3인은 부산과 동래 사람으로 강원도에 생선을 사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중 김첨지로 불리는 김백선이라는 노인은 일본말을 약간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643년, 그가 18세였을 때 조선왕조가 일본에 파견하는 통신사 일행을 따라 도쿄까지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이 스킬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이게 됩니다.
아무튼 이지항 일행은 이제 부산포에서 출항합니다~~~ 뿌우뿌우~~~
출항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5일)
"순풍을 타고 출발했다. 사공과 노잡이 등 4명은 모두 울산 성황당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다. 8인이 좌해로 항해했다. 바람이 순하지 않아서 포구마다 들러 정박했다."
('좌해'는 왼쪽 바다, 즉 동해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옥좌에 앉은 왕의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 왼쪽을 구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거꾸로입니다.)
4월 28일
"바람이 순해져서 다시 출항했다. 그런데 오후 늦게 바람이 옆쪽에서 불기 시작했고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이 거세어졌다. 그 바람에 배의 뒷부분 나무가 부러지고 부서져서 거의 물에 빠질 뻔했다. 다행히 노를 대신 꽂아 배를 간신히 지탱해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은 면했지만, 강한 바람에 휩쓸려 큰 바다로 떠밀려가 밤새도록 바다 위를 떠다녔다."
(날짜를 보니 더욱 수상합니다. 부산에서 영덕까지 고작 150km 가는데 15일이나 지체할 리가 있을까요? 태풍 시즌도 아닌 음력 4월, 양력 5월입니다. 중간에 어딘가에서 머물며 유흥을 즐겼거나, 아니면 뭔가 말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배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28일에 다시 바다에 나갔지만 풍랑에 배 뒷부분 방향타가 부러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먼 바다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4월 29일 (표류 2일째)
"아침에 보니, 끝이 없는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사방이 구름에 덮여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막막할 뿐,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배에 걸쳐진 나무에 허리를 매고, 비옷을 덮어 몸을 가렸다. 기력이 다하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다들 죽은 사람처럼 잤다."
4월 30일 (표류 3일째)
"새벽녘, 아직 날이 다 밝기 전인데 밖에서 누가 엉엉 소리내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일어나 허리에 묶어 놓았던 끈을 풀고 일어서서 보니, 사방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바닷물은 거세게 일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이미 밝아지고 있었지만 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 뜨는 쪽을 보고 동쪽을 짐작해보니, 배는 대략 북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를 젓는 사람에게 조심하고 방심하지 말라고 조용히 당부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배를 정박했던 그곳을 떠난 이후 밥이나 죽 같은 끼니를 한 번도 제대로 지어 먹지 못했고, 그저 생쌀을 씹으며 약간의 물로 겨우 갈증을 달래며 버텨 왔다."
표류 7일째
"물이 다 떨어졌다. 작은 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여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燒酒)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사발 가량의 증류수(蒸溜水)를 받았다. 역시 소금기가 없어졌다. 그것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먹여 약간 갈증을 풀게 했다. 그 후로 번갈아 가면서 불을 지펴 증류수를 받아 먹었다."
표류 8일째
"저녁 6시쯤 물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물개는 배 가까이 와서 배 깃대에 앞발을 걸치기도 하고, 때로는 동쪽으로 헤엄쳐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김북실이 칼을 들고 그 물개를 찔러 죽이려 하자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물개가 우리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점괘를 보았더니 천지비괘(天地否卦)가 나왔네. 이 괘는 전체적으로는 불길한 괘지만 재물 운을 지니고 있고 오늘의 일진은 복덕(福德)에 닿아 있으니 우리는 반드시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걸세.”
그 말을 듣자 모두들 안심하고 다 함께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계속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 역시 조선시대 양반은 노답입니다. 다 같이 굶어죽을 판에 사냥을 하기는 커녕 점을 보고 앉아있습니다. 뱃사공들이 관세음보살을 외친 이유는 안심해서가 아니라 한가하게 점괘 얘기나 하고 있는 양반이 답답해서일 것입니다.)
표류 9일째
"저녁 무렵 북서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해 우리는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가 과연 언제쯤 육지에 닿아 정박할 수 있을까' 하고 점을 쳐보니... (이후 점괘 얘기 생략)
그러던 중, 자정 무렵에 바람이 멎더니 동쪽 하늘이 밝아오며 곧 서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내가 일본 지도를 본 적이 있는데, 동쪽은 전부 육지였소. 또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온 사람의 말로는, ‘일본 중부에 대판성(오사카)이 있고 거기에는 황제라 불리는 이가 있으며, 동북방의 강호(江戶, 에도/도쿄)에는 관백(막부 지도자)이 있는데, 오사카에서 육로로만 가도 도쿄까지 16~17일 걸릴 정도로 땅이 길다’ 하였소. 그래서 지금 우리가 동쪽 끝까지 밀려간다면 반드시 일본 땅 어딘가에 닿게 될 것이니, 이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는 요행이오.”
하지만 뱃사공들은 이렇게 말하며 반박했다.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질 않으니, 여긴 끝도 없는 대양과 연결돼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모두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님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그날 새벽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치고, 거센 파도가 솟구쳐 뱃전에 부딪히며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모두가 배 안에 엎드려 죽을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큰 바람이 잦아들었고, 다시 서풍이 불며 배는 동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배 앞쪽에 태산처럼 커다란 무언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위쪽은 하얗고 아래쪽은 검게 보였는데, 아직 흐릿하게 보이는 상황임에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산이었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산 아래로 나아가 정박하려고 했지만 그 사이 날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배는 흔들려서 안정되지 않았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모두 기운이 빠진 데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치면서 물이 가득 차 거의 뒤집힐 뻔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힘을 모아 배를 움직이고 작은 통 두 개로 물을 퍼내며 가까스로 침몰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옷이 물에 흠뻑 젖어 모두 추위에 덜덜 떨었다. 우리는 간신히 물이 얕고 굽이진 해안을 찾아 정박한 뒤 비옷을 덮고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하늘 중간까지 우뚝 솟아 있었고 중턱 위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산기슭 아래쪽에 임시로 지은 듯한 초가집 20여 채만이 보였다.
우리가 그 집들에 가보니 집 안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 대구와 청어였다. 잡어들도 말려서 저장하려는 듯 매달아 놓은 상태였다.
뱃사공들은 그 고기들을 가져다가 삶아서 먹고 물도 마실 수 있을 만큼 잔뜩 마신 뒤, 배가 북처럼 불러오도록 배부른 채로 쓰러져 잠들었다. 우리는 그곳에 배를 정박해 놓고 배에서 내려 비옷을 덮은 채 잠을 자거나 뒤척이며 또다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해안으로 올라가 연기가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다. 서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돌아선 곳에서 연기가 제법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마치 밥을 짓는 연기처럼 보였다. 우리는 곧 배를 그쪽으로 옮겼다.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 정도의 인가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을 고는 사람들의 집과 매우 비슷했다.
고기잡이를 하는 왜인들의 움막일 것이라 생각하며 아직 정박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여섯 사람이 우리 배 쪽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누런 옷을 입고, 머리카락은 검푸르고 길었으며, 수염도 길고 얼굴은 새까맸다. 우리는 깜짝 놀라 배를 정지시키고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았다."
홋카이도 아이누족
"나는 뱃사람들에게 그들을 불러보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고, 아마 그들도 우리 같은 이를 생전 처음 보는 지라 말을 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인들은 아니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혹시 살해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 중 몇몇 노인은 검은 털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그저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중 한 노인이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 삶은 물고기 몇 조각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들의 집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흔들고 소리치듯 말했다. 아마 우리를 그쪽으로 데려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피할 곳도 없었다. 결국 죽을 각오로 배를 저어 그곳에 정박하고 모두 하선했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날카로운 창검이나 칼 같은 무기는 없고 단지 조그마한 칼 하나를 차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집은 소금 굽는 천막과 같았고, 숨을 만한 은밀한 공간은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대부분 말린 생선, 익힌 복어, 기름을 먹인 가죽옷 정도였다. 도구로는 낫, 도끼, 길이 반 발 정도 되는 나무활, 사슴 뿔로 만든 화살촉이 달린 나무 화살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사납지 않은지 시험 삼아 행동을 살펴보았다. 겉모습은 흉악했지만 본래 사람을 해치는 자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하는 걸 보고 나를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점점 두려움이 가셨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수없이 세워 놓고 물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았다. 고래고기를 포로 뜬 것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글자로 의사소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간에 말도 통하지 않아 나는 손짓으로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어탕(물고기국) 한 그릇만 줄 뿐, 밥은 주지 않았다.
어떤 이는 나무껍질로 짠 누런 옷을, 어떤 이는 곰이나 여우,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대개 한 치(약 3cm) 남짓 길이였고, 수염은 모두 길었으며 길이는 한 자(약 30cm), 혹은 한 발(약 60cm)에 달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은 흰자위가 도드라졌고 남녀 모두 신발이나 버선을 신지 않았다. 생김새는 남녀 구분이 어려웠는데 여자만 수염이 없어 그걸로 구별할 수 있었다. 60세 가량 된 노인 하나는 목에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안을 보여달라고 하니 그 안에는 수염이 담겨 있었다. 수염이 너무 길어 불편하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손으로 그 수염을 잡아 길이를 재보니 한 발 반(약 90cm)쯤 되었다."
"날이 저물자 그들은 다시 어탕 한 그릇과 고래고기 몇 점을 주었지만, 끝내 밥을 짓는 기색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의 모든 인간은 다 곡식을 먹는다.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짓는 풍속이 없단 말인가? 아마도 우리에게 먹일 쌀이 아까워 밥을 짓지 않는 것이겠지."
그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을 짓는지를 살펴보았더니 어느 집에서도 밥을 짓지 않았고, 모두 어탕에 물고기 기름을 넣어 먹고 있었다. 이들은 원래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우리는 이미 쌀이 다 떨어져 여행용 그릇을 꺼내 보여주며 쌀을 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그들은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그제야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굶주린 채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이 되자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언덕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동북쪽에 육지가 뚜렷이 보였다. 그래서 뱃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선 밥을 주지 않고 우리 배에는 쌀이 떨어졌으니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저쪽에 가면 사람이 많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갈 길도 찾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뱃사람들은 내 말을 믿고 함께 배를 저어 그 작은 바다를 건너갔다. 그곳에도 역시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 지명을 물었더니, 그들은 다만 “제모곡”이라고만 했다. 배고프다는 손짓을 해보였지만, 역시 어탕 한 그릇만 주었을 뿐이었다. 순풍을 타고 30리쯤 더 나아가 또 다른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명을 물으니 그들은 “점모곡”이라 했다. 그들이 질문을 이해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하자, 그들은 삶아 먹을 수 있도록 많이 내주었다.
그곳에는 벚나무 껍질이 많았다. 그것을 횃불로 사용하자 불꽃이 매우 밝았다. 나는 산모퉁이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동남쪽에 커다란 육지가 있었는데 산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지세가 큰 육지 같아 보였다. 그쪽을 가리키며 지명을 물었더니 “지곡”이라 답했다. 거리를 가늠해보니 불과 30리쯤이었다. 바람을 타고 그쪽으로 건너갔는데, 하루종일 닿을 수가 없었다. 바다 위에서의 거리 감각은 육지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결국 겨우 배를 대고 상륙했지만, 그곳 사람들도 앞서 본 무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먹는 것도 여전히 물고기뿐이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토사자환(兎絲子丸, 정력제)을 짐 속에 둔 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꺼내 뱃사람들과 나누어 물과 함께 먹었다. 갈증이 조금 누그러졌다. 우리는 그곳에 그대로 노숙했다. 지명을 물으니 그 사람들은 “소유아”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329년 전, 아직 일본에 편입되지 않고 아이누족의 땅으로 남아있었던 홋카이도에 다녀온 조선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록을 살펴봅니다.
지난 5월 OR 편집자는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그 여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방송 중에 제가 '조선시대에 우리가 먼저 홋카이도에 진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는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기록을 찾아보니 실제로 임진왜란 100여년 후인 1696년에 홋카이도 북쪽, 일본 최북단의 오호츠크해까지 구경하고 돌아온 조선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그의 이름은 이지항. 흔히 '이선달'로 불리는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홋카이도까지 표류했습니다. 그리고 도쿄(강호), 오사카(대판),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한 이야기를 '표주록(漂舟錄: 표류하는 배의 기록)'이라는 글로 남겼습니다.
조선 양반 이지항은 당시 일본 사람들도 잘 몰랐던 홋카이도와 오호츠크해에 대해 어떤 관찰을 했을까요? 2회에 걸쳐 현대어로 바꾼 전문을 게재합니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표주록 번역본(문선규, 1974)을 사용했습니다. 누구나 보실 수 있습니다.
표주록 (1696)
배경설명
표주록이 나온 1696년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약 1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당시 조-일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그래도 양국간 교류는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조선은 부산포에 '왜관'을 두어 대마도 상인들이 교역을 할 수 있게 했고, 일본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보내서 일본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1682년에 통신사가 파견됐었으니 일본 현지의 소식을 들은지도 14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또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는 교역이나 소통이 없었습니다.
필자 이지항(李志恒)은 동래(현재 부산시 동래구)에 살던 사람으로 당시 50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들 둘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결혼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젊어서 무과에 급제해서 서울에 올라왔고 수어청(수도방위사령부)의 군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 동래에 내려와 상을 치렀습니다. 조선시대는 요즘처럼 3일장만 치르고 끝내는 게 아니라 몇 년을 무덤을 돌보며 보냈습니다. 그도 고향에서 느긋하게 놀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안식년이네요.
그러던 4월 중순, 이지항은 경북 영덕 쪽에 볼일을 보러 간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동래에서 말을 타고 부산포(부산항)로 내려간 다음 거기서 생선장수들의 배를 얻어 탑니다. 타고 온 말은 노비에게 쥐어 집으로 돌려보내고요.
조선 말기 부산포의 모습
사실 경남 동래에서 경북 영덕까지는 직선거리 150km 정도 밖에 안 되고 중간에 높은 산도 없으니 당시 사람들의 걸음 속도로 며칠 안에 커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지항은 군인이니 걸음도 빨랐을 것이고 말도 있으니 더 빨리 가죠.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인지 굳이 불편하게 바다에서 배를 탔습니다. 시종도 없이 혼자서요. 좀 수상하쥬? 쌀 서 말(5 x 3 = 15kg)과 돈 두 냥도 가지고 탔으며, 뒤에 나오겠지만 정력제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추측은 하지 않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의 승선 인원은 총 8명입니다.
생선장수 3인은 부산과 동래 사람으로 강원도에 생선을 사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중 김첨지로 불리는 김백선이라는 노인은 일본말을 약간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643년, 그가 18세였을 때 조선왕조가 일본에 파견하는 통신사 일행을 따라 도쿄까지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이 스킬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이게 됩니다.
아무튼 이지항 일행은 이제 부산포에서 출항합니다~~~ 뿌우뿌우~~~
출항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5일)
('좌해'는 왼쪽 바다, 즉 동해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옥좌에 앉은 왕의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 왼쪽을 구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거꾸로입니다.)
4월 28일
(날짜를 보니 더욱 수상합니다. 부산에서 영덕까지 고작 150km 가는데 15일이나 지체할 리가 있을까요? 태풍 시즌도 아닌 음력 4월, 양력 5월입니다. 중간에 어딘가에서 머물며 유흥을 즐겼거나, 아니면 뭔가 말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배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28일에 다시 바다에 나갔지만 풍랑에 배 뒷부분 방향타가 부러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먼 바다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4월 29일 (표류 2일째)
4월 30일 (표류 3일째)
표류 7일째
표류 8일째
(* 역시 조선시대 양반은 노답입니다. 다 같이 굶어죽을 판에 사냥을 하기는 커녕 점을 보고 앉아있습니다. 뱃사공들이 관세음보살을 외친 이유는 안심해서가 아니라 한가하게 점괘 얘기나 하고 있는 양반이 답답해서일 것입니다.)
표류 9일째
5월 12일 (표류 13일째?)
이지항 일행이 도착한 리시리섬. 높이 1700미터가 넘는 화산섬이다.
다음 날
홋카이도 아이누족
일본 최북단, 오호츠크해를 바라보는 소야(Soya) 곶. 바로 이곳이 '소유아'이다.
- 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