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스타인 파일 추가 공개 -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 총장 나락 가다

2025-11-18

요즘 '영포티'라는 말이 유행인데, 미국에선 '영 식스티'가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제 금융계의 거물, 래리 서머스 (로렌스 서머스 Lawrence Summers, 71) 전 하버드 총장/미 재무장관의 안타까운 사연이 공개된 것입니다. 구애의 상대는 30살 연하의 중국 여교수였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오래된 대학, 하버드의 전 총장이자 종신 경제학과 교수이고, 클린턴 정권의 재무장관이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미국 대통령의 경제 자문역으로 일해온 보스턴의 대표적 지성입니다. 그가 미성년 성착취 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을 '윙맨'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불륜 연애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던 것이 엡스타인의 이메일 파일에서 드러났습니다. 


서머스는 심지어 2019년 7월 엡스타인이 뉴욕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되기 하루 전까지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합니다. 그때는 이미 엡스타인의 범죄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였는데도 말입니다.



위대한 경제학자도 연애에 대해서는 감이 부족했나 봅니다... 


래리 서머스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저명한 거시경제학자이며 넓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글로벌 엘리트 사회의 거물입니다. 다보스 포럼 같은 곳에 붙박이로 등장하는 인물이죠. 하버드대 총장으로서, 전 미국 재무장관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영화 '소셜네트워크'에서도 당시 재학생이었던 윙클보스 형제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잠깐 등장합니다.


그는 28세에 최연소 하버드 종신교수가 됐고 38세에는 40세 이하 최고 경제학자에게 주는 클라크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집안도 빵빵합니다. 그의 삼촌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이고 외삼촌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 입니다. 서머스 본인은 노벨상을 탈 정도의 연구는 못했지만 대신 학계와 관계의 영향력은 아주 강했습니다.  FT나 NYT 같은 유수 언론에도 국제경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기고를 했습니다.


서머스는 특히 한국 경제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자문과 조언을 해줬기에 지한파로 꼽히기도 하는 인물입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바로 서머스의 박사과정 제자였습니다. 서울대 교수였던 이 총재를 ADB, IMF 등 국제기구로 끌어준 사람도 서머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민간 기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Square, Lending Club, Premise Data 등 여러 핀테크 업체의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했습니다. 현재는 세계 최대 비상장회사인 오픈AI의 이사회 멤버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부끄러운 스캔들이 터지며 화려한 경력이 가려지게 됐습니다. 이번 사건이 보도된 후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단, 하버드대 경제학과 강의만큼은 계속 하고싶다고 했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사실 불륜을 하든 말든 그것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입니다. 다만, 미국 경제학계의 상징이었고 재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미국 최악의 성범죄자인 엡스타인과 이런 식으로 얽혀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둘은 절친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이메일 교환


서머스는 같은 대학 영문과 명예교수인 엘리사 뉴와 2005년 결혼한 유부남입니다. 그런데 하버드대 학보사 '하버드 크림슨'의 17일 보도에 따르면, 서머스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페릴(위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제자(mentee)를 꼬시는 방법에 대해 앱스타인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는 지난 주 수요일 미국 하원의회에서 약 2만 건의 제프리 앱스타인 관련 파일들이 공개되며 알려지게 됐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2018년 당시 65세의 서머스가 흑심을 품은 여성은 진 케유(金刻羽)라는 중국인 경제학자였답니다. 김 씨시네요.

 

위키피디아 사진


진 케유 교수는 1982년생으로 베이징 출신입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하버드에서 공부하며 경제학 학사,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영국 LSE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테뉴어)로 근무했고 현재는 홍콩과기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 관련 연구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본인 홈페이지도 있습니다. 영어와 중국어 더블 네이티브이고 불어도 잘 한다고 써있습니다. 아마 하버드에 오기 전에도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거주했던 것 같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리신 사진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서머스가 뭐라 하든, 진 케유 교수는 훌륭하게 처신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래리 서머스가 아무리 하버드 전 총장에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권력자이자 부자라고 해도, 그런 평범한 외모로 거의 30살 연하인 진 케유 교수를 유혹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진 케유도 서머스 뺨치게 잘 나가는 집안의 외동딸입니다.


진 교수의 아버지 진 리춘(서머스보다 1살 위)은 중국의 고위 관료입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창립 부총재를 지내는 등 중국 정부의 대표적인 국제금융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중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기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창립 총재도 2016년부터 맡고 있습니다. 그밖에 수많은 금융 관련 정부기관과 국제기구에서 중국 정부를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파이낸셜타임스 'Lunch with FT' 코너에 나온 적도 있죠. (래리 서머스도 그 코너에 나왔었습니다). FT의 표현에 따르면 진 리춘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금융 관료 중 한 사람(one of the most powerful financial officials in the world)"입니다. 서머스에게 꿀릴 게 전혀 없습니다.


진 케유는 그 아버지만큼 똑똑한 딸이고, 중국 정부 장학생으로 하버드를 다녔을 것이고, 가만히 있어도 중국 정부가 이끌어주는 대로 커리어의 탄탄대로가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대단한 출세를 더 많이 하겠다고 굳이 자기 아버지 또래인 65세 배나온 미국인 유부남 할아버지와 사귀고 싶었을 리는 만무해 보입니다.


래리 서머스도 진 케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둘 다 국제 금융계의 거물이니까요. 그런데 조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그녀에게 아버지를 칭찬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서머스는 2018년말부터 앱스타인에게 진 케유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해줬더니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난 요즘 총알을 피하며 사는 것 같아. 연락을 안 하는 게 옳겠지만, 그녀가 아쉬워하지 않을까? 나도 그럴 것 같아."

"컨퍼런스왔다. 오늘이 D데이다! 그녀는 엄청 멋있다. 똑똑하고 딱부러지고 고져스하다. 나는 X된 듯."


이런 한탄도 했습니다.

"야, 내가 아무리 해도 그녀의 경제학 멘토 밖에는 되지 못할 것 같아. 내 생각에 나는 그녀의 "백 미러 카테고리(흘러간 사람들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것 같아."

"그녀는 아주 당황한 것 같고 어쩌면 나를 끊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직업적 네트워킹이 필요해서 끊지는 못하는 것 같아."

 

그러자 앱스타인이 친구 서머스에게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그녀는 너와 함께 할 운명이야"


원래 말은 공짜죠.


몇 달 후, 서머스가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앱스타인에게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번엔 진 케유가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을 첨부했습니다. 경제학 논문 하나에 대해 피드백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야, 이거 내가 대답 바로 안 하고 좀 기다리게 하는 게 낫겠지?"

앱스타인이 답합니다.


"벌써 걔가 좀 아쉬운 입장인 것 같은데?"


이들은 이후 서머스와 진 교수와 잠을 자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공유했다고 합니다. 10대 청소년도 아니고 60대 노인들이... 좀 웃기긴 합니다. 이들은 여자 얘기 외에도 많은 얘기를 일상적으로 나누는 절친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버드 크림슨 지는 진 케유 교수에게 이 내용에 대해 질의를 했는데 진 교수는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그는 모범적으로 이 난처한 상황을 넘긴 것으로 보입니다. 딱히 할 말도 없어 보입니다. 한편 래리 서머스는 하버드 크림슨에게 보낸 답변에서 보도된 이메일 내용을 인정했습니다. "내 인생에 큰 후회가 있습니다. 전에도 얘기했듯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친분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버드 크림슨 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역시 이메일 내용을 따로 보도했습니다. 다만 너무 개인적인 대화내용도 있어서 보시는 분이 조금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엡스타인 파일



제프리 엡스타인은 잘 알려져있듯이 미국 정계와 재계, 연예계의 주요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미성년자 성착취를 한 인물입니다.  그의 악행은 2018년 마이애미 헤럴드 지의 특종 보도로 공론화됐습니다. 그는 2019년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감옥에서 자살(타살이란 의혹도 있음)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접대를 받았는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채 수사가 종결됐습니다. 수사 파일도 그대로 덮였습니다.


다만 그간 조금씩 공개된 여러 자료들을 통해 빌 게이츠, 영국 앤드류 왕자(찰스왕의 동생) 등이 엡스테인과 친하게 지냈음이 밝혀졌습니다. 엡스타인의 전용기 탑승 명단 같은 것도 공개됐죠. 그 속에서 서머스 외에 리드 호프먼(링크드인 창업자, 민주당 기부자)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름도 거론됩니다. 빌 게이츠가 이혼한 이유도 부인 멜린다 여사가 더러운 낌새를 알아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죠.


영국 앤드류 왕자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해서, 그가 앱스테인의 주요 고객이었음이 드러나고 엡스타인이 소유한 섬에서 미성년 여성과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지난 10월 30일 영국 왕가로부터 아예 파문을 당했습니다. 쉽게 말해 호적에서 파인 겁니다. 앤드류 왕자에서 그냥 앤드류가 되어버린 거죠. 


트럼프, 멜라니아 여사(결혼 전), 엡스타인, 길레인 맥스웰(공범). 2000년 사진.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아직 이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역시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던 시절 엡스타인과 알고 지냈고 파티에서 여러 번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민주당 측은 트럼프가 엡스타인 관련 자료들의 공개를 막고 있다며 공개하라고 요구해왔습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뉴욕 살던 시절 사교계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지인이었을 뿐이고 친구가 아니었다'고 답변한 바 있습니다. 그와의 친분에 대해서서도 '더 공개하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공개할 게 있었으면 민주당이 집권할 때는 왜 공개 안 했냐?'라고 말해왔습니다. 


이런 미심쩍은 태도에 대해 그간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측 일부 의원들과 트럼프의 지지층인 서민 MAGA 운동가들도 반대해왔습니다. 기자들도 만날 때마다 같은 얘기를 물어봅니다. 이렇게 엡스타인 파일을 모두 공개하라는 요구가 강해지자,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생각을 바꿨습니다. 며칠 전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서 '에라이 그래, 파일 다 공개하자!'고 말한 것이죠.


이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엡스타인 파일이 미 의회에서 공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서머스처럼 떨고 있는 권력자들과 엘리트 인사들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1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