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 본 조비, 기업 CEO처럼 철저한 락가수 (FT 주말판 인터뷰)

2025-11-10

최고의 락가수이면서도 락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존 본 조비. 정치에서도 늘 민주당을 지지하던 그는 트럼프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사람일까.


@jonbonjovi


Date published: 31 October 2025

Henry Mance

Source: FT.com

참고: 이 기사는 FT 주말판 기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텍스트가 길고 특별한 결론이 없습니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소식은 내부자들로부터 바깥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이제 바깥 사람들은 그것을 나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존 본 조비(Jon Bon Jovi)가 원래 스케줄보다 앞서있다는 내용이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그는 더더욱 스케줄을 앞서 나가고 있다.


물론 그러할 것이다. 록앤롤 스타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가 '호텔에서 깨워야 하는 건장한 십대'라면, 본 조비는 그 이미지를 깨뜨린다. “Livin’ on a Prayer”와 “You Give Love a Bad Name” 같은 앤섬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 밴드 프런트맨은 자신을 CEO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는 생활이 매우 깔끔해서 마치 행동주의 투자자를 상대하는 기업 CEO처럼 보인다.

본 조비가 1980년대에 명성을 얻었을 때, 그는 스판덱스 바지와 파마머리로 록 음악에 섹스 어필을 불어넣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아마도 그의 더 지속적인 업적은 조직 운영 능력일 것이다. 1991년, 본 조비 밴드의 첫 매니저는 비꼬듯이 본 조비에게 “그렇게 훌륭한 아이디어가 많으면 네가 직접 일을 해보라”라고 제안했다. 본 조비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매니저를 해고했다. 그는 레코드를 쓰고, 티켓을 팔고, 계속해서 존재감을 유지하며 40년에 걸친 커리어를 이끌어 왔다.

“우리가 드디어 만났군요!”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소리쳤고, 이 'FT와의 점심' 이벤트까지도 자신의 업적으로 즐겁게 추가했다.

그는 내게 치과의사가 아닌 것이 안타깝게 만드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기타가 아닌 것이 다행스럽게 만드는 악수를 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부드럽게 비틀어 올려 문자 그대로 본인이 고수(高手)임을 과시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비유적으로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그는 탄탄하고 단정했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단색 티셔츠, 몸에 꼭 맞는 스웨이드 재킷, 스위스 샬레 지붕 위 눈처럼 흐트러짐 없는 긴 머리, 그리고 가벼운 여유의 걸음. 유명하지 않은 사람도 이런 외모를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시도하진 말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그걸 훨씬 더 잘 해낸다.


63세의 존 프랜시스 본지오비 주니어 (John Francis Bongiovi Jr)는, 유명세가 반드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의 살아있는 증거다. “이제 인생의 이 시점에서 저는 제 자신으로 사는 게 아주 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명성은 거짓말쟁이이자 도둑이에요. 저는 명성이 사람들을 망치는 걸 봐왔습니다. 당신의 가치가 얼마나 많은 객석을 채우고 얼마나 많은 음반을 팔았는지로 측정된다면, 잠자리에 들 때 아주 외로울 겁니다. 베개는 당신이 몇 장의 티켓을 팔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우리 둘 다 그가 1억3000만 장의 앨범과 4000만 장의 콘서트 티켓을 팔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그의 공식 약력에 적혀 있다. 본 조비의 대표곡들은 각각 스포티파이에서 10억 회 이상 재생되었다. 내 경험상, 그의 노래 없이는 어떤 결혼식도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이건 제가 하는 일이고, 잘하는 일이지만, 그게 저 자신은 아닙니다. 제 인생엔 훨씬 더 많은 게 있어요. 가족도 있고, 사업도 있고, 테니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활동도 있다. 본 조비는 1990년대부터 미국 민주당 후보들을 지지해왔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과 카멀라 해리스의 유세 마지막 무대에서 공연했다. 사람들이 민주당이 ‘현실과 동떨어진 연예인들’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말할 때, 그 '연예인' 중엔 그도 포함되어 있다.

본 조비는 그 비판을 이해했을까? “그렇다고 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제가 그런 선거 캠페인에서 하는 일은 누구에게 투표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 역할은 단지 사람들이 현장에 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다음에 정치인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죠.”

하지만 그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말에는 신경질을 낸다. 그는 뉴저지에서 네 곳의 무료 커뮤니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저는 거기서 직접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합니다. 일주일 내내, 1년에 365일요. 이건 허영심으로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진짜 fucking 직업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당신은 현실을 몰라’라고 말한다면, fuck you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와서 설거지해보라고요. 오늘 밤에도 주방은 열려 있습니다. 아무도 그걸 부정할 수 없어요.” 

이만큼 성공하려면, 미소 뒤에 강철 같은 공격성도 갖고있어야 한다. 그게 꼭 누구 특정인을 향하는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며칠 전, 본 조비는 혼자서 반(反)트럼프 집회인 ‘노 킹스(No Kings)’ 시위에 참여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노숙인에게 집을 제공하고,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문제에조차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없다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허락도 없이, 누군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백악관을 (트럼프처럼 리노베이션해서) 모독하려 한다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가 미국 정치를 말할 땐 노래 가사에 절대 넣지 않는 언어를 사용했다. “It's fucked.”




우리는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의 밴드는 2026년 9월 이곳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이는 4년 만의 첫 투어인 ‘포에버 투어’의 일부다. 그동안 본 조비의 성대 중 하나가 심하게 위축되어, 의사가 그의 목에 플라스틱을 삽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가 바라는 건 다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제가 아는 그 공명, 그 음파를 만들어내는 것 말이죠.” 그는 자신의 목 피부를 잡으며 말했다. “그게 제가 유일하게 갈망하는 겁니다.” 회복은 쉽지 않았다. 그는 한 번에 세 시간씩 공연할 수 있을 만큼 다시 회복하길 바라고 있다.

오늘 점심을 제공하는 접대 회사는 델라웨어 노스(Delaware North)다. 이름만 들으면 뉴저지 근처에 있을 것 같지만, 푹신한 이 스위트룸은 집과는 전혀 다르다.
“이게 그립지는 않아요. 여기서 호텔까지 운전해 돌아가는 것도, 무대 뒤 케이터링도, 이런저런 헛소리도, 시차 적응도 그립지 않아요.” 


인터뷰 식사 메뉴
웸블리 스타디움 Box 4017, Wembley Stadium, London HA9 0WS

스파클링 워터
보콘치니와 토마토 샐러드
파파르델레 비프 라구
치킨 알프레도
오이와 토마토 샐러드
파파르델레 채소 라구
식물성 알프레도
초콜릿 브라우니
티라미수
총액: 무료

셰프는 본 조비의 이탈리아 혈통을 고려해 파스타 중심의 코스 메뉴를 구성했다. “냄새가 끝내주네요!” 그가 말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귀띔했다. “저희는 어릴 때 일주일에 여섯 번 파스타를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파스타를 많이 안 먹습니다.” )

우리 인터뷰의 규칙상 음식값은 FT가 부담해야 하지만, 이 식사는 웸블리 스타디움과의 계약에 포함된 것이다. 만약 우리 규칙을 고집하려면 밴드의 투어 전체를 후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와인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잔을 식탁 위에서 몇 인치 옆으로 밀어둘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몸짓이 주목받는다는 걸 안다. “먹는 중이라 미안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요.”



그는 자서전을 쓰지 않은 몇 안 되는 록스타 중 하나다.

“필요 없어요. 우리 밴드 내부에도 그런 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진부한 록스타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의 ‘과한 시절’은 대부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23살 때, ‘여자를 쫓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정정하자면, 쫓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먼저 와있습니다. 그건 이 직업의 보상 중 하나죠.”) 하지만 그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아내 도로시아와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으며, 마약 반대 공익광고에도 출연했다.

그의 부모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아버지는 미용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꽃집을 운영하다 나중에 그의 팬클럽을 이끌었다. 본 조비는 “모든 아이들이 겪는 정신적 괴로움은 있었지만, 끝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한 부모님이 계셨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머리 위엔 지붕이 있었고, 늘 응원을 받았죠”라고 말했다.

그는 미성년자 신분으로 뉴저지의 바에 몰래 들어가 록 밴드 공연을 보곤 했다. 그리고 1980년 무렵 어느 날 밤, 아직 고등학생이던 그는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같은 무대에 올랐다. 이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믹 재거, 데이비드 보위 등으로부터 배움을 얻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빅 스타일수록 사람은 더 친절하다고.

“그분들은 그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아요.”

그의 우상 프랭크 시나트라는 성격이 거칠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들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본 조비 밴드는 야망과 끊임없는 투어로 성공을 일궜다. 1980년대 중반까지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큰 록 밴드였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관객보다 훨씬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롤링스톤』의 공동 창립자 얀 웬너가 그들을 록앤롤 명예의 전당 입성에서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웬너는 “본 조비가 음악사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 밴드는 2018년에야 마침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우린 참았습니다. 끝까지 버텼어요. 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그 영화에서 퀸과 ‘보헤미안 랩소디’를 깎아내리는 롤링스톤 기사가 등장하잖아요. 그들도 수없이 틀렸죠. 하지만 더 잘 모르는 젊은 시절엔, 그런 언론의 관심을 얻고 싶어 안달이었으니까, 그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는 “Livin’ on a Prayer”가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대 500곡’ 최신 리스트에서 몇 위에 올라있는지 알고 있을까?

“없죠?”

457위다. 칼리 레이 젭슨보다 뒤에 있다.

“괜찮아요. 논쟁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요.”


음악 바깥으로도 활동을 확장한 건 그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주지사 출마 제안은 거절했지만, 주택과 식량 지원 사업에 자금을 댔다.

“저는 제가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걸 알 만큼은 똑똑합니다. 도로나 다리를 어떻게 짓는지는 몰라도, 뉴저지엔 밥을 먹여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압니다.”

2014년 그는 미식축구팀 버펄로 빌스를 인수하려 했지만, 자신이 그 팀을 캐나다로 옮기려 한다는 주장에 시달렸다. 본 조비는 그런 음모론을 부인한다. 이 캠페인의 배후에는 당시 경쟁 입찰자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측근 마이클 카푸토가 있었다.

“마치 위대한 암살자가 나를 겨냥한 것 같았어요. 우리는 10억 달러짜리 수표를 들고 갔습니다. 팀을 사기에 충분했죠. 하지만 트럼프는 그 빌어먹을 서류를 제출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는 돈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성경책 더미 위에서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거기 있었으니까요.” (결국 제3의 인물이 버펄로 빌스를 인수했다.)

음악계에도 그런 건달들(bullies)이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그건 한 레벨 위였어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습니다.”

본 조비는 어느새 파스타 두 그릇을 비워냈다. 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명성을 새삼 실감했다. 스타덤이란 언제나 일정이 있고, 차가 있고, 전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대화는 그의 재량에 따라 계속될 뿐이다. 원하면 그는 내 포크 위의 스파게티보다 더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급할 거 없어요.” 그가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나의 스파게티는 결국 포크에서 미끄러졌다.



본 조비의 스트리밍 횟수 Top 5

Living On A Prayer (1986, 총 33억회)


You Give Love a Bad Name (1986, 총 18억회)


It's My Life (2000, 총 22억회)


Always (1994, 총 18억회)


Wanted Dead or Alive (1987, 총 8억회)




본 조비는 지금까지 공연을 약 3000회 했다. 40년 동안 2주에 세 번꼴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콘서트는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 팬들이 그들의 노래를 몰랐고, 본 조비 특유의 ‘쇼맨십’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는 러시아 군복을 빌려 입고 중앙 통로를 따라 “스트립쇼 비슷한 퍼포먼스”를 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생각을 얻는 법을 알고 있었어요. 둘째 날 공연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한 번은 헬싱키에서 연골이 파열돼 의사가 투어를 취소하라고 권했다.

“아니라고 했죠. 무릎뼈는 가수의 뼈와 연결돼 있지 않잖아요. 공연은 계속돼야 합니다.”

지금도 그는 무대 위에서 “30회 이상 공연에 온 열성 팬”을 알아본다. 그의 관객층은 “두 세대, 이제는 세 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1997년에 그는 “You Give Love a Bad Name”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답답하다고 말했었다. 그 노래가 발표된 지 1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히트곡들을 부르는 것을 기꺼이 즐긴다.

그는 한때 밴드 더 애니멀스(The Animals)의 에릭 버든이 히트곡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를 레게 버전으로 부르는 것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버든의 커리어는 내리막길이었다.

“그 분의 태도는 ‘이 노래 진절머리나니까 그냥 돈이나 받고 끝내자’였어요. 그런데 저는 너무 기대됐죠. ‘제발 원래 버전으로 해주세요, 저는 당신의 다음 세대니까 진짜 그 노래를 듣고 싶어요’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Livin’ on a Prayer’의 디스코 버전을 하고 싶어졌다면, 답은 하나예요. 하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노래를 원래 그대로 듣고 싶어 하니까요.”


본 조비 팬 중엔 마지막 드라마 하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2013년 약물중독 문제로 밴드를 떠난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리치 샘보라의 밴드 복귀다. 본 조비는 애정을 담아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밤에 공연이 있었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요. 그냥 그만뒀습니다. 80회의 공연이 더 남아 있었고, 수백만 명이 티켓을 샀어요. 그런데 그냥 안 오겠다고요? 와우. 하지만 공연은 계속됐습니다. 그 투어는 매출 1위를 기록했죠.”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은?

“그는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아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갤러거 형제처럼 꼭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밴드를 한다는 게 종신형은 아니잖아요.”


본 조비가 젊은 시절 가장 후회하는 일은, 너무 무리하게 투어를 다닌 탓에 번아웃이 온 것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에드 시런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천천히 하라고요. 아직 보지 못한 인생의 다음 장들이 남아 있고, 그건 지금의 눈부신 명성보다 더 멋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며느리가 된 배우 밀리 보비 브라운에게도 같은 말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저는 미래의 유령 같은 존재예요. 언젠가 그녀가 그런 조언을 원한다면, 좋은 조언 상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이제 밴드의 일상 운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이제 음악 비즈니스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하지만 여전히 그는 ‘운영자’다. 내가 물었다. “ABBA 보야지(Abba Voyage) 공연처럼, 본 조비를 홀로그램으로 구현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 있나요?”

“받았어요. 하지만 그들은 지식재산권을 자기들이 소유하길 원하더군요.” 그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이게 제 답이었죠.”


매니저가 티라미수를 가져왔다. 본 조비는 접시에서 그것을 몇 인치 밀어냈고, 곧 테이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비건 브라우니와 커피를 원했다.

“저 때문에 시간 잡아먹는 거 전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우유병을 건넸다. “우유 좀 넣으시겠어요?”

그의 성대 문제는 그를 더 내성적으로, 더 가톨릭적으로, 덜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플로리다 팜비치에 집을 두고 있다. 그곳의 정치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추운 곳에 있지 않으면 날카로움을 잃어요. 부드러워집니다. 그래도 12월 아침 8시에 야외에서 테니스를 칠 수 있는 건 좋죠.”

그는 59세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테니스는 그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었고, 목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눈치챈 건 다른 점이었다.

테니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더 이상 완벽하게 통제하는 ‘프로 경영자’가 아니었다. 열정적인 아마추어였다.

“완전히 미쳐 있어요. 진짜 미쳤어요. 테니스에 미쳐버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열정이 사그라지길 바랄 정도예요.”

프로 선수들 곁에 있을 때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느끼는 경외감을 느낀다.

“저 완전 빠돌이(groupie)에요!” 아마도 그가 여전히 스타로 남아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도 여전히 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웸블리 경기장 아래쪽에서 호주 럭비 리그 대표팀이 훈련 중인 것을 발견했다. 본 조비는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너무 걸리겠네요.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놓쳤네요.” 그가 아쉬워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럭비 리그가 뭔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는 다시 한 번 내 손목을 친근하게 비틀더니, 곧장 경기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약간 스케줄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헨리 맨스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피처라이터이다.

헨리 맨스가 꼽은 본 조비의 대표곡 5선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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