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 3500억 달러'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 (오호츠크 오피니언)

2025-10-31


안녕하세요, 오호츠크 리포트입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은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구두 합의했다고 합니다. 약 500조 원입니다. 우리나라 일년 예산의 2/3에 달하는 돈입니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언론은 이 3500억 달러 투자가 협상의 핵심이라고 보고, 조금이라도 덜 불리한 조건으로 매듭짓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 결과, 연간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장기간 투자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협상팀의 노고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과 논란은 5년 후 돌아보면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일 것입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장난에 우리가 놀아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호츠크는 예전부터 이 3500억 달러 협상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한 독자분이 그런 발언의 근거에 대해 물으셨는데, 이번에 그 얘기를 자세히 해보겠습니다. 편집자의 의견이며, 독자 여러분의 의견도 환영합니다. 



1.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투자를 강요할 수 있는가


전쟁을 치르고 내는 패전 보상금도 아닌데,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투자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강제성도, 정당성도 없습니다. 지금 트럼프가 뭐라고 하든, 한국이 그런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 트럼프 본인도 상대 국가들이 이런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리라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평소처럼 즉흥적으로 말을 던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언론매체들은 3500억 달러라는 금액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치 무슨 대단한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이는 트럼프라는 사람을 너무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트럼프는 자신이 받을 생각도 없는 3500억 달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며, 신라 금관을 선물로 받은 일을 더 만족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기왕 합의해주는 것이라면 우리도 5500억 달러, 아니 향후 100년간 1조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말했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그걸 진지하게 이행할 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반 미국 시민들이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를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할까요? CNN이나 NBC 뉴스에서 5초쯤 다루고 사라지는 일입니다.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아무도 기억 안 합니다.



2. 미국이 지금 외국 정부의 투자가 필요한 나라인가?


미국은 어디 아프리카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아닙니다.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미국 국내에도 자본이 넘쳐납니다.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가 있든 없든 미국에겐 별 상관 없습니다. 돈이 넘치다보니 '게임스톱' 같은 밈주식 기업이나 '비욘드미트' 같은 콩고기 제조업체에도 전 세계에서 수십조 원의 투자금이 우르르 몰려드는 나라입니다.


트럼프가 한국 일본 등에게 요구한 투자액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액수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 던진 것입니다. 트럼프가 무슨 엑셀 파일이라도 돌려서 저런 숫자를 산출해냈을까요? 무슨 AI 알고리즘이라도 돌려서 계산해낸 숫자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저 돈을 받아서 어디에 어떻게 쓴다는 계획도 트럼프에겐 전혀 없었습니다. Bottom-up으로 취합된 숫자가 아니고 그냥 top-bottom으로 내려가는 숫자입니다.


트럼프가 필요했던 건 '외국들이 나 때문에 이렇게 미국의 부흥을 돕는다'라는 상징성일뿐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대미 무역 흑자를 많이 보는 나라니까 '너네도 돈 좀 내라' '너네 때문에 미국 제조업이 망가졌으니 너네가 다시 미국에 공장 지어라'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3500이란 액수는 그냥 막 던진 숫자일뿐입니다. 우리만 심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3. 대규모 투자를 받는 게 미국에게 좋은 일인가? 


미국처럼 이미 자금 유동성이 풍부한 나라가 굳이 외국 정부의 투자까지 끌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에 역효과가 납니다. 금융투자와 인프라투자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시장입니다. 정부가 개입하면 이 금융시장이 망가지고 왜곡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AI를 위한 발전소 인프라 사업을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프로젝트 주체가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텐데, 5% 정도의 이자를 지급하면 민간 투자금을 모집할 수 있다고 해보죠. 그런데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게 이 채권을 강매한다면, 이자를 4%, 3%로 낮출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민간 자본들은 5%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기회를 날리는 것입니다. 공공 투자가 민간 투자를 crowding-out(밀어내기)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자국 내에 투자 자금이 충분하다면, 또 사업성이 충분하다면 굳이 해외 투자를 끌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트럼프가 3500억 달러 투자유치를 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어디에 그 돈을 투자하라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안 할 것입니다. 돈이 될만한 투자 기회를 자국 금융기관(=자국 시민들의 연금펀드)에게 주지 않고 외국 정부에게 준다고요? 미국은 그럴 필요가 없는 나라입니다. 사업성이 떨어지는 프로젝트도 엄연히 수요와 공급의 시장이 존재하므로, 정부가 함부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요약하자면, 트럼프는 진짜로 돈이 필요해서 한국과 일본에 수천억 달러 씩의 투자를 요청한 게 아닙니다. 그에게 그런 돈은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트럼프는 '제조업 일자리'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 목표는 관세와 각종 협박으로 대부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반발 없이 관세를 0%에서 15%로 올리기 위해서 이런 쇼를 한 것입니다. 거기에 한국이 순진하게 말려들었을 뿐입니다.


그냥 관세를 올리겠다고 하면 우리가 반발할 게 뻔하죠. 그래서 트럼프는 "관세 25% 맞을래 15% 맞을래? 니네가 3500억달러 내면 15%로 해줄게"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용산전자상가의 휴대폰 세일즈맨처럼, 마치 협상을 통해 우리에게 대단한 혜택이라도 주는 것처럼 프레임을 짠 것입니다. "Art of the Deal(협상의 법칙)"이란 책을 쓴 저자 답지요. 한미FTA라는 국가간 협약을 깨버리는 행위를 한 것은 트럼프 쪽인데, 우리가 그에 대해 항의도 제대로 못하고 프레임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3500억 달러 투자 합의 이행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별도의 투자펀드(=조직)를 만든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아직 확정된 일은 아니겠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구상에 어떤 나라의 정부가 특정 국가에 돈을 퍼주기 위한 조직을 별도로 만들까요? 우리나라 정부는 정말 그렇게 자존심이 없을까요? 그런 조직을 상설기구로 만들면 기획재정부에서 은퇴한 공무원들, 고위직 공무원들과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들의 고액연봉 일자리만 늘려주는 꼴로 이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유교랜드 한국식 행정 편의주의입니다. 반면, 일본은 개별 프로젝트 단위로 대미 투자펀드를 운영할 거라고 합니다. 개별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청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 정부가 해야할 일은 간단합니다. 3500억 달러나 되는 우리 국민들의 돈을 진짜로 미국에 '투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걸 위해 정부 내 상설 조직까지 만드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입니다. 상대방도 그걸 진지하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이 주는 돈 따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돈 받지 않아도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부자입니다. 한국은 잠시 눈치 보고 있다가 트럼프가 관심이 소홀해지면 그 돈을 그냥 미국산 에너지를 구입하는데 쓰면 됩니다. 에너지는 우리가 어차피 어느 나라에서든 수입해야 하는 것이니 손해도 아닙니다. 


아, 진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이번 협상으로 한미 관계 논의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트럼프는 협상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트럼프에게 있어 협상은 절대 끝나지 않는, 영원히 계속되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는 태생이 부동산 개발업자입니다. 부동산 개발업은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협상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때로는 법정 소송을 하는 일이 밥먹듯이 벌어집니다. 어느 순간 마무리된 것 같아도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른 이슈로 협상이나 싸움이 시작되는 업입니다. 트럼프는 그 업종에서 수십 년간 성공해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국가관계 역시 그에겐 부동산 개발이나 다름 없습니다. 트럼프가 살아있는 한 그와의 협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OR



3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