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 정치는 전쟁을 막지 못했나' 퇴임하는 이시바 일본 총리의 종전 80주년 메시지

2025-10-12

이번 주말 우리나라 SNS에서 화제가 된 이시바 총리의 종전 80주년 기념 연설입니다. 1940년대 아시아 여러 나라와 호주, 하와이까지 침략해 많은 비난을 받아온 일본. 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은 끔찍한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 이시바 일본 총리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솔직하게 다뤘습니다. 지난 달 UN 총회 연설에 이어 두 번째 명연설입니다.


물론 일본인 입장에서 말하다보니 한국을 비롯한 여러 이웃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했던 역사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그 이후 벌어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한 내용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20세기 초부터 일본이 왜 군부에 휘둘리게 됐는지, 일본 정치 시스템의 어떤 특성 때문에 민간 정치인들이 군부를 제어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현직 일본 총리가 자국의 역사를 비판한다는 면에서 새겨 들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약점이 무엇인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무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훌륭한 연설이라 전문을 번역합니다. 원문은 일본 총리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올해는 전후 80년입니다. 저는 국내외 전몰자 위령 행사에 참석하고,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위령식,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평화기념식, 8월 15일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왜 그 전쟁을 막지 못했는가, 정치는 어떤 역할을 다했고 또 다하지 못했는가”라는, 오래전부터 품어 온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강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전후 50년, 60년, 70년의 고비마다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었고,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도 저는 계승하고 있습니다. 한편 과거 세 차례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막힘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시도했고, 국내 정치 시스템은 이를 멈추지 못했다”는 대목이 있으나, 그 이상의 상세한 논의는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국내 정치 시스템은 왜 멈추게 하지 못했는가. 이번에 발표한 「소감」은, 지금까지의 담화에 남겨진 과제에 대한 저의 생각이며, 국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어떤 경위로 그 전쟁에 돌입했는가. 당시의 대일본제국헌법, 정부, 의회, 언론 각각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대일본제국헌법입니다. 이 헌법 아래에서 군을 지휘하는 통수권은 독립된 것으로 규정되어 ‘문민 통제’의 원칙이 제도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은 내각의 수반이면서도 내각을 통솔할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정치와 군사를 통합해 국가 의사를 일원화하려면—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면—“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를 필요로 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국헌법이 안고 있던 제도적 문제였습니다.

1910년대에서 1920년대로 들어서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가 되자, 앞서 말한 정치와 군사의 ‘매개’ 역할이 원로에서 정당으로 옮겨갑니다. 정당 내각 초기에는 ‘천황외교’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대 해석되어,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과 예산에 대한 정부·의회의 관여와 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에 이릅니다.

정당 간 정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정당은 점차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의 일부와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은 군정뿐 아니라 예산과 체제 정비에도 미친다”라고 주장하며 당시 정부를 격렬히 공격했습니다.

1935년에는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이 입헌정우회의 정부 공격 소재가 되어, 군부까지 휘말린 정치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며 정치적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압력에 굴복해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 내고, 미노베 씨의 저작은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의회는 어떠했습니까. 본래 군에 대한 통제를 수행해야 할 의회도 그 기능을 상실해 갔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1940년 중의원 사이토 다카오 의원 제명 문제입니다. 사이토 의원은 전쟁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비판하고 “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엄격히 따졌습니다. 이에 육군은 “육군을 모욕했다”고 격렬히 반발하며 의원 사직을 압박했고, 다수의 의원이 동조해 제명 찬성 296표, 반대 7표로 압도적 가결이 되었습니다. 당시 회의록은 지금도 약 61퍼센트가 삭제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의회의 군 통제 기능과 관련해 예산 심의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시 의회가 군사 예산을 제대로 점검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쇼와 17년(1942)과 전쟁 마지막 해인 쇼와 20년(1945)에는 군사비 대부분이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 계상되었습니다. 특별회계 심의에서 예산 내역은 제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회에서 심의가 이루어졌으며, 시간도 지극히 짧아 심의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정치적 테러가 있었습니다. 다이쇼 후기에서 쇼와 초기에 걸친 15년 동안, 현직 총리 3명을 포함한 다수의 정치인이 국수주의자·청년 장교 등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5·15 사건, 2·26 사건 등은 이후 의회와 정부의 문민이 군의 정책과 예산을 진지하게, 자유롭게 논의하고 행동할 환경을 크게 훼손했습니다.

언론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1920년대 언론은 일본의 대외 팽창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예컨대 언론인 이시바시 하야마 씨는 ‘식민지 포기’ 논지를 폈습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 이후 내셔널리즘이 확산되고, 사상계에서도 전체주의를 수용하는 토양이 조성되었습니다. 만주사변 무렵부터 언론은 적극적 전쟁 지지로 돌아섰고, 전쟁 보도는 ‘팔리는’ 기사였습니다. 신문 발행 부수는 몇 배로 늘었고, 많은 국민이 현혹되어 내셔널리즘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그 후 1937년 가을 무렵부터 언론 통제는 강화되어 정책 비판은 봉쇄되었고,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가 지배했습니다.

게다가 정보 수집·분석 체제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당시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은 “유럽의 천지가 복잡괴기한 신정세를 낳았다”는 말을 남기고 총사직했습니다. 세계 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첫째, 현행 일본국헌법 아래에서는 문민 통제가 제도화되어 자위대는 내각총리대신의 지휘 하에 있습니다. 내각총리대신 아래 내각의 통일성도 담보되어 있습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설치되어 외교·안보 정책의 종합 조정도 강화되었습니다. 정보 수집·분석 체제도 개선되고 있습니다. 다만 제도가 갖춰졌더라도 적절히 운용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정치는 실력 조직인 자위대를 다룰 능력과 견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하며,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자위대도 국제정세·장비·부대 운용에 관해 전문가 집단으로서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표명해야 합니다.

정치는 조직 간의 ‘세로 칸막이’를 넘어 통합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 의사를 일원화하지 못한 채 국가 전체가 전쟁으로 치달았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는 항상 국민 전체의 이익과 복지를 생각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개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았듯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고 사태가 막히면, 성공 가능성이 낮고 위험이 크더라도 ‘용감한 목소리’와 ‘대담한 해결책’이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합리적 판단이 결여되고 정신적·정서적 판단이 중시되어 국가의 진로를 그르치는 역사를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것은 의회와 언론입니다. 국회는 헌법에 의해 부여된 권능을 행사해 정부 활동을 적절히 점검해야 합니다. 정치는 국익을 해치는 당리당략과 자기 보신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론과의 관계에서는 사명감을 지닌 저널리즘을 포함한 건전한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과도한 상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며, 편협한 내셔널리즘과 차별·배제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폭력에 의한 정치 유린,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발언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기반 위에서 역사를 배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인의 주장에도 겸허히 귀 기울이는 관용을 갖춘 본래의 리버럴리즘, 그리고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정치 형태가 아니며, 실력 조직 앞에서는 매우 쉽게 훼손될 수 있습니다. 문민 정치인이 판단을 그르쳐 전쟁으로 돌진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쟁의 기억을 지닌 이들이 해마다 줄어드는 지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능동적·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선택을 통해 평화 국가의 기초를 더욱 다져야 합니다.

때때로 제가 인용하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말이 있습니다. “그 전쟁에 갔던 녀석이 이 나라의 중심에 있는 동안은 이 나라는 괜찮다. 사라졌을 때가 무섭다.” 지금의 일본에 매우 시사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엔 총회 일반토론 연설에서도 말했듯,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저는 이를 굳게 믿습니다. 그 점을 다시 강조하며 첫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연설 끝



이후 기자 질문: 홍콩 피닉스TV

올해는 전후 80주년이기도 해서, 외국에서도 일본의 역사 인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과거의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보고 계신지, 그리고 사죄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 듣고 싶습니다.
2015년 아베 담화에서는 “다음 세대의 일본인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총리께서는 이 점, 즉 사죄의 본질과 그 계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시바 총리:
우선,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은 전후 연합국, 특히 미국에 의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은 가치 판단을 포함해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앞의 대전(大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전쟁은 일본과 중국의 충돌에서 비롯되어, 이후 1941년 12월 8일 대미·대영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 정부도 그 전쟁이 침략이 아니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인식에 서 있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70년 담화에서 “다음 세대에 사죄를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사자가 아닌 세대가 사죄의 책임을 지는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 ‘당사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위청 장관이던 시절, 싱가포르에서 열린 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했을 때, 리콴유 당시 상급장관으로부터 “일본이 전쟁 중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했는지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교과서 수준의 지식밖에 없었고, 리 장관은 “그것밖에 모르는가”라며 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제게 하나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과거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잊어도, 각 지역의 사람들은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올해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준비 과정에서도 저는 각국과 일본의 관계, 특히 전쟁 중의 관계를 가능한 한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는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사자성’과는 별개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노력, 그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입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등에서 일본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역사 인식을 일본이 성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이 앞으로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일본이 과거의 역사와 성실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신뢰를 얻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일본의 국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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