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된 세상에서, 팬덤은 사회적 초능력이다.

게재일: 2025년 10월 30일
사이먼 쿠퍼
출처: FT.com
나는 내 쌍둥이 아들들이 축구에 너무 빠졌다고 느낀 적이 있다. 축구는 그들의 시간, 감정, 우정을 엄청나게 집어삼켰다. 파리 사람인 그들은 국제대회에서 프랑스를 응원하기에, 그 중 한 명은 2018년 월드컵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넣은 두 번째 골이 자신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애 엄마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아이는 잠시 멈추더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아기를 낳거나, 결혼을 했거나, 장학금을 받은 정도는 아니지만요.”
나 역시 한때 한 팀만 응원하던 스포츠광 어린이였기에 이런 내 아이들의 모습을 걱정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원자화된 우리 시대에서 스포츠가 상대적으로 건강한 종류의 집착이라고 느끼게 됐다. 스포츠는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미워하지 않고 즐기도록 돕는다. 아이들을 소셜미디어와 비디오게임에서 조금은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특히 남성에게는 너무 드물어져 버린, '타인과의 연결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 신선한 근거가 있다. 비영리단체 '모어 인 커먼(More in Common)'이 폭스스포츠와 협력해 미국 성인 5200명 이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열성적인 스포츠 팬일수록 정치적 분열 구도를 넘어서는 사회적 연결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더 지지하며, 자선 기부, 헌혈, 지방선거 투표 같은 다양한 시민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음이 드러났다.
핵심은, “팬은 친구가 더 많다(Fans have more friends).” 벤 발렌타와 데이비드 시코르작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수십 년에 걸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회학자 재닛 리버는 1983년 펴낸 선구적 저서 『사커 매드니스』에서 브라질 축구 팬들이 친구, 이웃, 가족과의 사회적 연결을 유난히 많이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있다. 스포츠 팬이 더 사교적으로 변하는가, 아니면 원래 사교적인 남성이 스포츠 팬이 되는가. 리버는 후자라고 시사했다. “팬덤은 팬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스포츠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스포츠로 이끈다면, 아이들의 타고난 성향이 어떻든 사회적 이익을 거둘 수 있다. 그래서 발렌타와 시코르작은 팬덤을 “사회적 초능력”이라고 부른다.
그 보호 효과는 놀라울 수 있다. 스테판 시만스키와 내가 함께 쓴 책 『사커노믹스』에서, 우리는 월드컵이나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는 나라들에서 자살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TV 프로그램을, 그것도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시청하고, 이후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외로웠던 사람들도 국가적 규모의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팬덤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유 정체성이다. 팬들은 결코 혼자 걷지 않는다(**).
반면에 교회, 정당, 가정 내 거실, 그리고 이제는 직장에서의 사회적 모임은 줄어들어 왔다. 디지털 이전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제공하는 거의 마지막 공간은 스포츠 경기장이다. 지나치게 상업화된 축구가 팬들을 소외시켰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사실은 다르다. 사람들은 형편없는 팀에게까지 몰려든다. 2022-23 시즌에는 잉글랜드 축구의 하위 세 개 디비전의 관중 수가 1953-54 시즌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인정하건대, 팬덤은 남성 쪽으로 기운다. 내 딸은 축구를 그만두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파리에서 이 스포츠가 아직도 소녀들을 잘 참여시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고립 위험이 더 높은 쪽이 남성이므로, 스포츠는 여전히 중요하다. 경기를 함께 보면 남성들끼리는 굳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는 사회적 접착제가 많지 않은 미국과 영국에서 특히 더 중요할지 모른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살 때, 일요일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외식하는 가족 무리를 보고 놀랐다. 영국에서는 희귀한 장면이다. 미국과 잉글랜드에서는 대형 클럽들이 계층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팬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팬덤이 사람들을 함께 묶을 잠재력이 특히 크다. 온라인에는 분노 섞인 스포츠 부족주의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세계만큼 심하진 않다.
스포츠팬들이 라이벌 팬을 미워하고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냐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축구 경기를 수백 번 보았지만, 누가 누구를 때리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폭력적인 팬들은 극우 성향으로 치우친 소수 변두리 집단이다. 외국인 혐오로 악명 높은 영국의 활동가 토미 로빈슨과, 루마니아의 최근 대통령 후보였던 조르제 시미온은 과거 훌리건이었다.
증오와 관련해서라면, 지금은 스포츠보다 정치에서 증오가 더 강하다고 나는 의심한다. 재닛 리버는 대부분의 브라질 축구팬들이 자신과 다른 클럽을 응원하는 친구를 두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라이벌 팀의 서포터들은 경기 결과를 두고 서로 빈정대면서 유대감을 쌓는다. 몇몇 광신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스포츠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탈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다음 날 아침이면 거의 온 나라가 평소처럼 일하러 가고, 형편없는 감독이라며 투덜거린 뒤, 공동의 경험에서 힘을 얻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치권의 팬덤과는 달리, 스포츠 팬들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팬덤이 그들에게 주는 것은 대개 승리가 아니고, 심지어 오락도 아니다. 그건 바로 소속감이다.

© The Financial Times Limited 2025. All Rights Reserved. Not to be redistributed, copied or modified in any way. Okhotsk Publishing is solely responsible for providing this translation and the Financial Times Limited does not accept any liability for the accuracy or quality of the translation.
**Fans never walk alone: 영국 축구팀 리버풀의 슬로건을 변형한 말.
양극화된 세상에서, 팬덤은 사회적 초능력이다.
게재일: 2025년 10월 30일
사이먼 쿠퍼
출처: FT.com
나는 내 쌍둥이 아들들이 축구에 너무 빠졌다고 느낀 적이 있다. 축구는 그들의 시간, 감정, 우정을 엄청나게 집어삼켰다. 파리 사람인 그들은 국제대회에서 프랑스를 응원하기에, 그 중 한 명은 2018년 월드컵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넣은 두 번째 골이 자신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애 엄마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아이는 잠시 멈추더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아기를 낳거나, 결혼을 했거나, 장학금을 받은 정도는 아니지만요.”
나 역시 한때 한 팀만 응원하던 스포츠광 어린이였기에 이런 내 아이들의 모습을 걱정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원자화된 우리 시대에서 스포츠가 상대적으로 건강한 종류의 집착이라고 느끼게 됐다. 스포츠는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미워하지 않고 즐기도록 돕는다. 아이들을 소셜미디어와 비디오게임에서 조금은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특히 남성에게는 너무 드물어져 버린, '타인과의 연결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 신선한 근거가 있다. 비영리단체 '모어 인 커먼(More in Common)'이 폭스스포츠와 협력해 미국 성인 5200명 이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열성적인 스포츠 팬일수록 정치적 분열 구도를 넘어서는 사회적 연결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민주주의를 더 지지하며, 자선 기부, 헌혈, 지방선거 투표 같은 다양한 시민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음이 드러났다.
핵심은, “팬은 친구가 더 많다(Fans have more friends).” 벤 발렌타와 데이비드 시코르작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수십 년에 걸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회학자 재닛 리버는 1983년 펴낸 선구적 저서 『사커 매드니스』에서 브라질 축구 팬들이 친구, 이웃, 가족과의 사회적 연결을 유난히 많이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있다. 스포츠 팬이 더 사교적으로 변하는가, 아니면 원래 사교적인 남성이 스포츠 팬이 되는가. 리버는 후자라고 시사했다. “팬덤은 팬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스포츠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스포츠로 이끈다면, 아이들의 타고난 성향이 어떻든 사회적 이익을 거둘 수 있다. 그래서 발렌타와 시코르작은 팬덤을 “사회적 초능력”이라고 부른다.
그 보호 효과는 놀라울 수 있다. 스테판 시만스키와 내가 함께 쓴 책 『사커노믹스』에서, 우리는 월드컵이나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는 나라들에서 자살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TV 프로그램을, 그것도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시청하고, 이후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외로웠던 사람들도 국가적 규모의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팬덤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유 정체성이다. 팬들은 결코 혼자 걷지 않는다(**).
반면에 교회, 정당, 가정 내 거실, 그리고 이제는 직장에서의 사회적 모임은 줄어들어 왔다. 디지털 이전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제공하는 거의 마지막 공간은 스포츠 경기장이다. 지나치게 상업화된 축구가 팬들을 소외시켰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사실은 다르다. 사람들은 형편없는 팀에게까지 몰려든다. 2022-23 시즌에는 잉글랜드 축구의 하위 세 개 디비전의 관중 수가 1953-54 시즌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인정하건대, 팬덤은 남성 쪽으로 기운다. 내 딸은 축구를 그만두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파리에서 이 스포츠가 아직도 소녀들을 잘 참여시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고립 위험이 더 높은 쪽이 남성이므로, 스포츠는 여전히 중요하다. 경기를 함께 보면 남성들끼리는 굳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는 사회적 접착제가 많지 않은 미국과 영국에서 특히 더 중요할지 모른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살 때, 일요일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외식하는 가족 무리를 보고 놀랐다. 영국에서는 희귀한 장면이다. 미국과 잉글랜드에서는 대형 클럽들이 계층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팬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팬덤이 사람들을 함께 묶을 잠재력이 특히 크다. 온라인에는 분노 섞인 스포츠 부족주의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세계만큼 심하진 않다.
스포츠팬들이 라이벌 팬을 미워하고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냐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축구 경기를 수백 번 보았지만, 누가 누구를 때리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폭력적인 팬들은 극우 성향으로 치우친 소수 변두리 집단이다. 외국인 혐오로 악명 높은 영국의 활동가 토미 로빈슨과, 루마니아의 최근 대통령 후보였던 조르제 시미온은 과거 훌리건이었다.
증오와 관련해서라면, 지금은 스포츠보다 정치에서 증오가 더 강하다고 나는 의심한다. 재닛 리버는 대부분의 브라질 축구팬들이 자신과 다른 클럽을 응원하는 친구를 두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라이벌 팀의 서포터들은 경기 결과를 두고 서로 빈정대면서 유대감을 쌓는다. 몇몇 광신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스포츠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탈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다음 날 아침이면 거의 온 나라가 평소처럼 일하러 가고, 형편없는 감독이라며 투덜거린 뒤, 공동의 경험에서 힘을 얻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치권의 팬덤과는 달리, 스포츠 팬들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팬덤이 그들에게 주는 것은 대개 승리가 아니고, 심지어 오락도 아니다. 그건 바로 소속감이다.
© The Financial Times Limited 2025. All Rights Reserved. Not to be redistributed, copied or modified in any way. Okhotsk Publishing is solely responsible for providing this translation and the Financial Times Limited does not accept any liability for the accuracy or quality of the translation.
**Fans never walk alone: 영국 축구팀 리버풀의 슬로건을 변형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