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3일 런던의 터키 대사관 앞. 중년의 한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하밋 조쉬쿤(Hamit Coskun, 50). 터키에서 온 망명자였고, 본인을 무신론자이자 사회운동가라 부르는 사람입니다. 조쉬쿤이 불 붙인 책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이었습니다. 그는 터키가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려 했습니다.
조쉬쿤은 "이슬람은 테러리스트들의 종교"라고 외치며 불타는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한 남자가 큰 칼을 들고 나와 그를 위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리는 가운데 조쉬쿤은 넘어졌고, 지나가던 오토바이 배달부가 달려와 그를 걷어찼습니다.


조쉬쿤은 런던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습니다. 재판에서는 24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를 찌르려 했던 사람은 불구속으로 풀려났습니다.
여기까지는 기괴한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코스쿤의 죄목입니다. 영국 검찰은 조쉬쿤 이 "이슬람 종교에 대한 범죄(an offence against the religious institution of Islam)를 저질렀다고 기소했습니다. 즉, 조쉬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교였던 영국에는 원래 신성모독죄(blasphemy)라는 죄목이 존재했습니다만, 시대착오적이라 2008년 폐지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 경찰이 신성모독죄나 다름 없는 이유로 코스쿤을 기소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영국 사회는 동요했습니다.
"기독교를 욕하면 무죄이고, 이슬람을 욕하면 유죄인가?"
"웨스터민스터 사원 앞에서 성경을 불태우면 괜찮고, 터키 대사관 앞에서 쿠란을 불태우면 범죄인가?"
이런 논란을 인지했는지, 영국 재판관은 그의 죄목을 살짝 바꾸었습니다. 6월 3일 내려진 판결에서 판사는 조쉬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비판한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주변에 있던 무슬림 시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범죄였다고 적었습니다. 또 그의 행동은 분명 무슬림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고도 적었습니다.
증거는? 판사는 "조쉬쿤 의 행동을 보고 달려와서 그를 공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무슬림들을 불쾌하게 만든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판결에 대해 영국 사회는 또 들끓었습니다. 아니, 폭행을 당한 사람에게 '네가 맞을 짓을 했네'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조쉬쿤은 당연히 항소를 진행 중입니다. 아래는 그가 The Spectator(영국), The Free Press(미국) 등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밋 조쉬쿤이다. '종교적 증오를 동반한 공공질서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내 “범죄”가 뭐냐고? 런던 터키 영사관 앞에서 꾸란을 불태운 것이다. 그 직후, 나는 거리 한복판에서 한 남성에게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어 경찰에 체포됐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책을 태우는 것은 합리적 토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내 조국 터키에서 세속주의가 무너지고 강경 이슬람주의로 치닫는 현실에 경각심을 주기 위한 정치적 시위였다.
그 행위 당시 나는 법이 내 편이라고 믿었다. 영국 검찰청(CPS) 지침에서도 명시되어 있다. 합법적인 시위는 불쾌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그래야 효과적이라고. 유럽인권협약 제10조는 ‘공손한 표현’뿐 아니라,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특히 정치적 표현은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나를 유죄로 판단한 논리 구조는 영국이 신성모독죄를 사실상 부활시킨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내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별도로 기소됐지만, 검찰은 오히려 그의 폭력을 내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다. “폭행을 당했다는 건 내 행동이 평화롭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질서 위반’ 여부는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얼마나 기분 나빠했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검찰은 또 내 행동이 정치적 시위가 아니라고도 주장했다. 나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정권이 터키를 이슬람 극단주의의 거점으로 만들고 있으며, 샤리아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로 시위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또한 SNS에 미리 예고했었고, 인터뷰에서도 무슬림 교도들이 아니라 이슬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이 모든 것이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감추기 위한 허울”이라 주장했다.
판사는 결국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나의 행동의 동기가 “종교 신자들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이슬람을 향한 비판이 자동으로 무슬림을 향한 증오로 해석된다면, 종교 교리에 대한 합법적 비판의 공간은 사라진다. 내 사건은 바로 그 경계선을 흐려버렸다.
판사는 왜 내가 ‘모든 무슬림’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비판한 것이었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유는 이렇다. 내가 공격당하는 동안 ‘에르도안’이라는 이름을 충분히 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검찰은 내가 언제 그렇게 외쳤어야 한다는 말인가? 첫 번째 폭행범에게 얻어맞는 도중에? 두 번째 폭행범이 쫓아오며 침을 뱉을 때? 바닥에 쓰러져 발로 차일 때? 그 순간에 케말주의 세속주의의 붕괴와 터키 공화국의 이상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지금이라도 설명하겠다. 내가 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는지, 공격자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한때 터키는 세속주의 국가였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 부모 같은 사람들이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내 어머니는 1915년 동부 지역 강제이주 중 희생된 아르메니아 여성의 손녀였고, 내 아버지는 쿠르드족이었다. 두 분 다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권위주의에 의문을 품는 태도를 배웠다.
1980년대 터키에는 군부의 그림자가 여전했지만 민간 정치가 작동했고, 케말주의 세속주의는 여전히 국가 운영의 근간이었다. 이슬람은 존재했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뒷 배경에 머물렀다. 우리 같은 세속주의 가정은 여전히 공화국의 이상을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청년 시절 합법적인 좌파 정당인 인민노동당(PLP)에 가입했고, 1993년에는 그 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내 동생은 1997년 정치적 활동 때문에 살해당했다. 2002년 석방된 뒤에도 발언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PLP를 떠났고, 터란 두르순(무신론 작가)의 피살과 우구르 뭄쥬(세속 언론인)의 암살은 터키에서 이견의 공간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1990년대 중반, 노골적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이 집권했고, 네즈메틴 에르바칸은 잠시 총리를 맡았다. 이후 군부는 그를 해임시켰지만, 그 세력은 더 젊고 전략적인 이름으로 재정비됐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이스탄불 시장이었던 에르도안이었다. 그는 곧 더 강력한 정권을 세우게 된다.
AKP가 200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기 전부터, 세속주의 질서는 이미 종교 보수주의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에르도안의 집권과 함께 터키는 정치신학의 국가가 됐다. 교육은 종교화됐고, 진화론은 삭제되고, 아이들은 꾸란 학교에 보내졌다. 하마스 인사들이 터키에서 보호받는다는 뉴스가 보도됐고, 경찰은 법이 아닌 ‘신앙’을 따르기 시작했다. 다시 체포된 나는 사복경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다시 들어가면 못 나온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총을 겨눴다.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왜 영국이었는가? 영국은 무신론자인 난민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5년 2월 13일, 나는 터키 대사관 앞에 섰다.
이슬람주의의 선전에 맞서는 행위가 영국에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이 나라로 망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나는 이곳에 있다.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언론연합(Free Speech Union)은 내 소송 비용을 지원했고,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한 모든 법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이 여전히 “어떤 종교도 비판을 초월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킬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터키에서 그 원칙을 지키려다 투옥됐고, 런던 영사관 앞에서도 같은 원칙을 지키려 했다. 나는 이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https://x.com/EYakoby/status/1933688335337140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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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런던의 터키 대사관 앞. 중년의 한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하밋 조쉬쿤(Hamit Coskun, 50). 터키에서 온 망명자였고, 본인을 무신론자이자 사회운동가라 부르는 사람입니다. 조쉬쿤이 불 붙인 책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이었습니다. 그는 터키가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려 했습니다.
조쉬쿤은 "이슬람은 테러리스트들의 종교"라고 외치며 불타는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한 남자가 큰 칼을 들고 나와 그를 위협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리는 가운데 조쉬쿤은 넘어졌고, 지나가던 오토바이 배달부가 달려와 그를 걷어찼습니다.
조쉬쿤은 런던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습니다. 재판에서는 24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를 찌르려 했던 사람은 불구속으로 풀려났습니다.
여기까지는 기괴한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코스쿤의 죄목입니다. 영국 검찰은 조쉬쿤 이 "이슬람 종교에 대한 범죄(an offence against the religious institution of Islam)를 저질렀다고 기소했습니다. 즉, 조쉬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교였던 영국에는 원래 신성모독죄(blasphemy)라는 죄목이 존재했습니다만, 시대착오적이라 2008년 폐지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 경찰이 신성모독죄나 다름 없는 이유로 코스쿤을 기소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영국 사회는 동요했습니다.
"기독교를 욕하면 무죄이고, 이슬람을 욕하면 유죄인가?"
"웨스터민스터 사원 앞에서 성경을 불태우면 괜찮고, 터키 대사관 앞에서 쿠란을 불태우면 범죄인가?"
이런 논란을 인지했는지, 영국 재판관은 그의 죄목을 살짝 바꾸었습니다. 6월 3일 내려진 판결에서 판사는 조쉬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비판한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주변에 있던 무슬림 시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범죄였다고 적었습니다. 또 그의 행동은 분명 무슬림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고도 적었습니다.
증거는? 판사는 "조쉬쿤 의 행동을 보고 달려와서 그를 공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무슬림들을 불쾌하게 만든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판결에 대해 영국 사회는 또 들끓었습니다. 아니, 폭행을 당한 사람에게 '네가 맞을 짓을 했네'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조쉬쿤은 당연히 항소를 진행 중입니다. 아래는 그가 The Spectator(영국), The Free Press(미국) 등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밋 조쉬쿤이다. '종교적 증오를 동반한 공공질서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내 “범죄”가 뭐냐고? 런던 터키 영사관 앞에서 꾸란을 불태운 것이다. 그 직후, 나는 거리 한복판에서 한 남성에게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어 경찰에 체포됐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책을 태우는 것은 합리적 토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내 조국 터키에서 세속주의가 무너지고 강경 이슬람주의로 치닫는 현실에 경각심을 주기 위한 정치적 시위였다.
그 행위 당시 나는 법이 내 편이라고 믿었다. 영국 검찰청(CPS) 지침에서도 명시되어 있다. 합법적인 시위는 불쾌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그래야 효과적이라고. 유럽인권협약 제10조는 ‘공손한 표현’뿐 아니라,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특히 정치적 표현은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나를 유죄로 판단한 논리 구조는 영국이 신성모독죄를 사실상 부활시킨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내게 폭행을 가한 사람은 별도로 기소됐지만, 검찰은 오히려 그의 폭력을 내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다. “폭행을 당했다는 건 내 행동이 평화롭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질서 위반’ 여부는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얼마나 기분 나빠했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검찰은 또 내 행동이 정치적 시위가 아니라고도 주장했다. 나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정권이 터키를 이슬람 극단주의의 거점으로 만들고 있으며, 샤리아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로 시위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또한 SNS에 미리 예고했었고, 인터뷰에서도 무슬림 교도들이 아니라 이슬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이 모든 것이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감추기 위한 허울”이라 주장했다.
판사는 결국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나의 행동의 동기가 “종교 신자들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이슬람을 향한 비판이 자동으로 무슬림을 향한 증오로 해석된다면, 종교 교리에 대한 합법적 비판의 공간은 사라진다. 내 사건은 바로 그 경계선을 흐려버렸다.
판사는 왜 내가 ‘모든 무슬림’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비판한 것이었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유는 이렇다. 내가 공격당하는 동안 ‘에르도안’이라는 이름을 충분히 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검찰은 내가 언제 그렇게 외쳤어야 한다는 말인가? 첫 번째 폭행범에게 얻어맞는 도중에? 두 번째 폭행범이 쫓아오며 침을 뱉을 때? 바닥에 쓰러져 발로 차일 때? 그 순간에 케말주의 세속주의의 붕괴와 터키 공화국의 이상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지금이라도 설명하겠다. 내가 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는지, 공격자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한때 터키는 세속주의 국가였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 부모 같은 사람들이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내 어머니는 1915년 동부 지역 강제이주 중 희생된 아르메니아 여성의 손녀였고, 내 아버지는 쿠르드족이었다. 두 분 다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권위주의에 의문을 품는 태도를 배웠다.
1980년대 터키에는 군부의 그림자가 여전했지만 민간 정치가 작동했고, 케말주의 세속주의는 여전히 국가 운영의 근간이었다. 이슬람은 존재했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뒷 배경에 머물렀다. 우리 같은 세속주의 가정은 여전히 공화국의 이상을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청년 시절 합법적인 좌파 정당인 인민노동당(PLP)에 가입했고, 1993년에는 그 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내 동생은 1997년 정치적 활동 때문에 살해당했다. 2002년 석방된 뒤에도 발언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PLP를 떠났고, 터란 두르순(무신론 작가)의 피살과 우구르 뭄쥬(세속 언론인)의 암살은 터키에서 이견의 공간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1990년대 중반, 노골적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이 집권했고, 네즈메틴 에르바칸은 잠시 총리를 맡았다. 이후 군부는 그를 해임시켰지만, 그 세력은 더 젊고 전략적인 이름으로 재정비됐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이스탄불 시장이었던 에르도안이었다. 그는 곧 더 강력한 정권을 세우게 된다.
AKP가 200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기 전부터, 세속주의 질서는 이미 종교 보수주의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에르도안의 집권과 함께 터키는 정치신학의 국가가 됐다. 교육은 종교화됐고, 진화론은 삭제되고, 아이들은 꾸란 학교에 보내졌다. 하마스 인사들이 터키에서 보호받는다는 뉴스가 보도됐고, 경찰은 법이 아닌 ‘신앙’을 따르기 시작했다. 다시 체포된 나는 사복경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다시 들어가면 못 나온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총을 겨눴다.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왜 영국이었는가? 영국은 무신론자인 난민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5년 2월 13일, 나는 터키 대사관 앞에 섰다.
이슬람주의의 선전에 맞서는 행위가 영국에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이 나라로 망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나는 이곳에 있다.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언론연합(Free Speech Union)은 내 소송 비용을 지원했고,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한 모든 법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이 여전히 “어떤 종교도 비판을 초월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킬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터키에서 그 원칙을 지키려다 투옥됐고, 런던 영사관 앞에서도 같은 원칙을 지키려 했다. 나는 이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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