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가 '마그'된 사연: 인디텍스의 수상한 러시아 사업 매각

2025-05-19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는 왜 먹히지 않을까? 자라 브랜드를 운영하는 스페인 인디텍스 사가 2002년 러시아에서 철수한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Silvia Sciorilli Borrelli, Courtney Weaver, Barney Jopson

May 15 2025


블라디미르 푸틴이 2022년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고 며칠 후, 자라(Zara) 브랜드를 운영하는 스페인 기업 인디텍스(Inditex)는 “러시아 사업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점포 수 기준으로 스페인에 이은 자라의 최대 시장이던 러시아와 깔끔히 결별하려는 모습이었다. 이 회사는 버쉬카·풀앤베어·스트라디바리우스 등 다른 3개 브랜드도 러시아에서 운영해 왔다.


하지만 이들이 취한 철수 방식의 세부사항을 보면, 인디텍스가 향후 러시아로 복귀하기에 유리하도록 셋팅을 해놨음을 알 수 있다. 


  • 2023년 초, 인디텍스는 러시아 법인에 현금을 투입했다. 이 법인은 지금 ‘뉴 패션’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리고 곧 그 법인을 매각했다. 매수자는 인디텍스의 중동 지역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레바논의 한 가족기업이었다.


  • 자라 등 인디텍스 브랜드들을 인계한 뉴 패션의 대체 브랜드들은 인디텍스와 거의 똑같은 상품을 팔고 있다. 


  • 공급망도 동일하고, 인디텍스 러시아 지점에서 일했던 직원들도 그대로 고용했다.


  • 또한 양사의 계약 조건에 따르면 인디텍스는 이번에 매각된 매장들을 언제든지, 비용 없이, 프랜차이즈 계약으로 즉시 전환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되면 인디텍스 브랜드들이 원래 매장으로 바로 돌아올 수 있다.



전쟁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라 매장

같은 자리에 들어선 마아그 매장


“이런 방식은 ‘부메랑 철수’라고 불리는 사례들과 비슷해 보여요. 복귀하기 좋은 시기가 오면 바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해두는 방식이지요.” 서구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철수를 연구한 울스터대학의 크리스티안 래슬릿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철수 과정에서 종종 보았던, 전형적인 전략 같습니다.”


이에 대해 인디텍스는 매각 후 러시아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회사를 지원하지도 않았다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회사는 이어 “이번 거래의 목적은 사업을 매각하면서도, 프랜차이즈 계약을 통해 시장에 다시 진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남겨두려는 데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상품의 유사성


인디텍스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직후 가장 먼저 러시아 사업을 접은 서방 기업 중 하나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 9일만에 러시아 현지 운영을 중단했다.


8개월 후, 인디텍스는 다헤르 그룹(The Daher Group)이라는 곳에 러시아 사업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매각 금액 등 세부사항은 거의 밝히지 않았다.


‘다헤르 그룹’이라는 이름의 법인은 실존하지 않는다. FT가 질의하자 인디텍스는 “다헤르 가문이 소유한 투자회사 집단의 일부가 구매자”라는 뜻을 나타내려고 그런 표현을 썼다고 설명했다. 다헤르 가문은 중동 지역에서 인디텍스 브랜드를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운영하는 아자데아 그룹(Azadea Group)의 오너다.


정확히 말하면, 다헤르 일가가 지배하는 ‘Mixed R DMCC’라는 회사가 지금 인디텍스의 옛 러시아 사업을 소유한다. 그 회사는 2022년 9월에 설립됐다. 이들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보면 “탁월한 패션 여정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이 적혀있다.


인디텍스의 러시아 사업을 인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회사는 새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인디텍스의 러시아 매장 243곳 가운데 상당수를 그 브랜드들이 차지했다. 예전에 자라, 풀앤베어, 버쉬카, 스트라디바리우스 매장이었던 곳들은 이제 각각 마아그, 더브, 에크루, 빌렛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적당히 브랜드 이름만 바꿨을 뿐, 옷걸이에 걸린 상품들은 예전과 비슷하다.


  • Zara → Maag
  • Pull & Bear → Dub 
  • Stradivarius → Vilet 
  • Bershka → Ecru


R-Mixed의 브랜드들


거래 자료에 따르면, 이들 4개 새 브랜드는 인디텍스 브랜드들이 쓰던 같은 공급업체들로부터 제품을 조달한다. 2023년과 2024년에는 인디텍스 주요 공급업체 3곳이 Mixed R 자회사인 R Mixed의 최대 공급업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인디텍스는 “여러 소매업체가 같은 공급업체를 쓰는 것은 업계에서 흔한 일입니다. 저희는 자사 브랜드가 판매하는 모든 상품의 독창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각사 온라인 스토어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새 러시아 브랜드들의 디자인은 자라 등 인디텍스 제품들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인디텍스는 “타 브랜드 디자인은 논평하지 않겠습니다”라고만 답했다.


자라 상품 / 마아그 상품


Mixed R는 아자데아 그룹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디자인과 구매 기능은 두바이에 있는 독립된 팀이 맡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자데아와 Mixed R DMCC는 지분 구조도 다르고 어떤 사업 연결도 없는 완전히 독립된 법인입니다”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법인 기록을 보면 Mixed R의 공동 소유주는 하산 갈렙 다헤르와 모하메드 알리 갈렙 다헤르다. 이 두 사람은 아자데아 그룹을 공동 소유한 네 형제 중 둘이다.


아자데아(Azadea)와 다헤르 그룹(Daher Group)을 소유한 네 명의 다헤르 형제와 그들의 지분구조



자라와 마아그는 제품 디자인만 닮은 게 아니다. 자라를 인수한 마아그는 2023년 봄·여름 컬렉션을 홍보하는 첫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그 촬영 장소가 비슷한 시기 자라가 컬렉션을 찍은 곳과 같았다. 이들의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따르면 두 브랜드의 캠페인은 같은 스페인 제작사가 카나리아제도의 란사로테 섬에서 촬영했다. 이에 대해 인디텍스는 “란사로테는 패션 업계가 화보를 찍으러 자주 선택하는 장소입니다”라고 말했다.




매각하려는 자회사에 투자를?


재무적으로도 이상한 점이 있다. 2022년 12월, 인디텍스는 러시아 법인 매각을 발표한 지 두 달 만에 본사가 러시아 법인에 빌려줬던 91억 루블의 대출과 이자를 탕감해줬다. 당시 환율로 약 1억2000만 유로였다. 기업 공시에 따르면 인디텍스는 그 뒤 네 달 동안 57억 루블, 그러니까 6500만 유로가 넘는 현금을 이 법인에 추가로 넣었다. 매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때였다.


러시아에서 다국적 기업 철수를 연구해 온 키이우 경제대학의 나탈리야 리발코 연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제가 아는 한, 서방 기업이 막 매각하려는 러시아 사업에 돈을 더 투자한 사례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매각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자금을 빼갑니다”라고 말했다.


회계법인 EY에서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를 지냈고 러시아 상장사 여러 곳에서 감사위원장을 맡았던 폴 오스틀링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상식적으로, 처분하려는 자산에는 통상 투자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오스틀링은 뉴 패션의 2023년 재무제표를 거론했다. 이 문서에서 인디텍스는 해당 자산을 비유동, 즉 매각대기 자산으로 분류했다. 그는 “비유동이자 매각대기인 자산에 왜 현금을 넣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인디텍스는 이렇게 해명했다. 인디텍스의 러시아 법인은 매출이 없었지만 운영비는 상당했다. 이 회사는 “직원과 지방 당국, 임대인 등에게 지고 있는 채무를 회사가 매각 중이라 해도 이행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본을 투입한 것이 상황에 맞는 조치였다는 얘기다.


거래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사업이 2022년 3월 문을 닫은 뒤 2023년 4월 매각될 때까지, 중동 지역의 잠재적 매수인으로부터 의류 선적 800건이 넘게 들어왔다. 이에 대해 인디텍스는 다헤르 일가와 “새 소유주가 러시아 사업을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매각 절차가 완료되기 전에 뉴 패션이 상품을 먼저 들여오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인디텍스와 R 믹스드는 매각 조건이나 금액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인디텍스는 2023년 1월 러시아 사업의 ‘실현가능 가치’를 1억8300만 유로로 계산했다. 매각 대금이 얼마나 됐느냐는 질문에 인디텍스는 러시아 사업 종료 비용이 2억3100만 유로였다고 답했다. 그리고 “매각으로 발생한 수익은 크지 않았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서방 의류업체의 러시아 사업을 잘 아는 이들은 인디텍스가 다헤르 일가와 맺은 계약이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계약서에 통상 포함되는 ‘재매각(buyback)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재매각 조항은 일정 기간과 금액을 정해 두고 한 회사가 다른 회사에게 팔았던 자산을 다시 사들이도록 허용한다.


인디텍스와 다헤르 그룹은 이런 재매각 조항을 넣는 대신, 시장 상황이 달라지면 다헤르 그룹이 매장을 인디텍스 프랜차이즈로 전환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들이 쓴 계약서에는 다헤르 측이 이를 “즉시” 실행할 “의무”가 있다고 적혀있다.



회전문 인사


한편 인디텍스의 디자이너·브랜드 디렉터·바이어 등 직원 수십 명은 UAE로 이주해 다헤르 그룹의 새 사업에 합류했다. 링크트인 페이지에 따르면, 사업 매각 거래 완료 전인 2022년에 먼저 자리를 옮긴 직원은 9명이었다. 나머지는 이후에 합류해 이미 그 회사에서 일하던 인디텍스 출신 동료들과 함께 일했다.


또 링크트인 기록을 보면 2023년 3월 인디텍스에서 R 믹스로 옮겨 신발 부문장을 맡았던 한 직원이 지난달 다시 인디텍스로 복귀했다고 나온다.


인디텍스는 2024년에 자발적 휴직을 800건 넘게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예년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다. 회사는 “스페인 노동법상 자발적 휴직은 근로자가 요구하면 회사가 반드시 허용해야 하는 권리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인디텍스와 다헤르 간 구조를 아는 관계자들은 두바이 지주회사의 직원 최소 한 명이 휴직한 상태로 여전히 인디텍스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러시아 사업 매각 계약의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인디텍스가 다른 서방 의류업체들보다 러시아 시장에 재진입하기 좋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언론은 올해 인디텍스가 조만간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와 미국 사이의 해빙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서방 기업과 일하는 관계자들은 이런 보도를 시기상조라고 일축했다. 인디텍스는 이를 “오해를 부르는 소문입니다”라며 논평을 거절했다.


울스터대 래슬릿 교수는 “제가 다른 사례에서도 본 패턴이 또 보이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자산을 UAE의 지주회사 이름으로 돌려놓으면, 정보를 찾기도 거의 불가능하고 검증도 어렵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또 그는 “러시아는 인디텍스 같은 서방 기업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시장이었습니다. 이런 구조를 보면 과연 철수가 진짜였는지, 아니면 돌아올 때까지 자산을 묶어둔 건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인디텍스는 자사의 재무제표가 이 매각 계약을 "신뢰할 수 있게, 정확하게,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말했다. 또 “충분한 근거가 없거나 정확한 분석에 기초하지 않은 의견이나 해석, 결론에는 논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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