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골마을 생 안투안 라바이. 십자군 전쟁 후 이곳에 병자들이 모이며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다.
사진: 트위터
매년, 프랑스 3 TV 채널은 ‘프랑스인의 가장 사랑받는 마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해 시청자들이 투표로 우승자를 정한다. 올해 생 앙투안 라바이(Saint Antoine-l'Abbaye)이라는 마을이 14개 최종 후보에 들자, 마을 주민들은 7월 2일 결승 생방송을 보기 위해 마을회관을 가득 메웠다. 한 주민은 “8등만 해도 괜찮다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해안가의 마을들이 내륙에 있는 생 앙투안보다 유리했다. 이 마을의 읍장 마리린 롱지스조차 여기를 “프랑스 한 구석에 있는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곳은 그르노블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걸리는 내륙에 있다.
그러나 이 언더독이 승리했다. 회관에 모 주민들이 “마-리-린!”을 외치는 동안, TV 화면 속의 마라린 롱지스는 진행자에게 “저는 너무 기쁩니다… 기쁘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리린 롱지스 읍장
한 달 뒤, 마리린 롱지스는 마을 중심 광장 ‘그랑드 쿠르’에 자리한 시청에서 나를 만나 “많은 주민이 우승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요”라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관광객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경제 개발 자체를 싫어한다. “내년에 선거가 있습니다.” 그녀는 우려했다. 생 앙투안의 정치인들은 정당 소속이 없어, 개인의 평판으로 선거에서 승부를 봐야한다.
진짜로 “가장 사랑받는 마을”에 뽑혔다는 이유로 읍장 선거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프랑스 코미디 여배우 같은 표정을 지닌 롱지스는 파란 마스카라로 강조된 눈을 크게 뜨며 “그렇다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떨어지면 남편은 기뻐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생 앙투안 마을의 기적적인 승리 이야기는 곧 프랑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파리로 떠나면서, 그림엽서 같은 마을 수백 곳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날 ‘잘 사는 프랑스 시골 마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래전에 죽은 이집트인의 유골 위에 세워진 생 앙투안 마을이 답을 내놓으려 한다.
카프카의 소설 『성』 속 마을처럼, 생 앙투안은 단 하나의 건물에 가려져 있다.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적어도 전해지기로는) 이집트의 성인 안토니우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파두아의 안토니우스나 다른 여러 성인 안토니우스와는 혼동하면 안 된다. 이 이집트 성인은 서기 251년에 태어나 수도사가 되었고, 사막을 헤매며 맹수를 물리치고 육욕을 이겨내며 하나의 종파를 창시했다. 그는 105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며 죽은 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전기를 썼다. 이 기록은 여러 필자에게 복사되고 왜곡되며, 기독교 수도원 주의의 아버지라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의 유해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장소에 묻혔다가 수 세기 뒤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고, 다시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1070년경 프랑스 기사 조슬랭이 이를 자기 마을로 가져간다는 허락을 받았다. 생 앙투안 박물관장 제랄딘 모셀랭에 따르면 “조슬랭은 그 유해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고, 결국 교회에 공개 전시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 수도원은 4세기에 걸쳐 건축되어 1490년에 완성됐다. 안토니우스의 유해가 수도원의 핵심 소장품이었지만, 누구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은으로 만든 상자 안에 보관돼 있다. 내가 읍장에게 “만약 그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안토니우스라면, 그가 평생 와본 적도 없는 이 프랑스 땅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행복해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은으로 만든 상자 안에 실제로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세의 여러 왕들과 많은 순례자들이 그 상자 때문에 이 마을로 몰려왔다. 주된 이유는 성 안토니우스가 ‘성 안토니우스의 불꽃병’이라는 질환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병은 환각증상(LSD와 비슷), 피부 병변, 괴저를 일으켰다. 수도원 주변으로 병원이 속속 세워졌다. 절단 수술을 받을 환자, 가난한 여성, 임산부 등 방문자 집단별로 병원들이 나뉘었다. 마을 박물관에는 그때 썼던 무시무시한 톱들이 전시돼 있다.
병자가 아닌 일반 순례자들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생 앙투안을 찾았다. 지금도 마을 아래쪽에서 수도원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돌길 ‘굴렛(goulets)’을 오르면 숨이 찰 수 밖에 없는데, 중세에는 신자들이 그 길을 무릎으로 오르도록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생 안투안 마을은 두 개의 경제 축을 갖게 됐다. 베네딕트회 수도승들이 주도한 순례 관광 산업과, 병원 수사들이 운영한 의료 산업이었다. 이 두 집단이 서로 충돌했을 때, ‘오스피탈리외르(Hospitaliers: 병원사람들)’라 불린 병원 수사 측이 승리했다. 그들은 곧 순례자 관광 사업까지 장악하게 됐다.
마을은 그렇게 오스피탈리외르라는 말이 '접객산업'을 의미할 정도로 보편화될만큼 수 세기 동안 번영했지만, 결국 일련의 재앙이 덮쳤다. 먼저 1596년, ‘성 안토니우스의 불꽃병’의 의학적 원인이 밝혀졌다. 곰팡이에 오염된 호밀이었다. 치료법은 단순했다. 오염된 호밀을 먹지 않으면 됐다. 이 마을을 찾는 불꽃병 환자들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전쟁이 생 앙투안을 휩쓸었다. 더 나쁜 것은, 성지순례가 시대에 뒤처진 풍습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1777년, 병원 수사들은 사라지고 조직은 몰타 기사단에 흡수됐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생 앙투안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정체됐다. 시청에 걸린 인쇄 지도를 보면 400년 전의 마을이 묘사돼 있다. 롱지스 읍장은 “요즘도 주민들이 이 지도를 보면서 ‘저기 우리 집이 있네!’라고 말해요”라고 했다. 거의 변한 것이 없다. 광장의 일부 건물들이 다른 용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날 더 이상 마구간이나 순례자 식당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내가 “20세기에 만든 건물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노란 집 하나가 있다고 답했다. “왜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저걸 대체 누가 허가했는지… 저는 아니에요.”
사진: 트위터
시골의 과거를 숭배하는 향수 어린 나라에서, 수세기 동안 경제 발전이 없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다. 중세 이후의 정체 덕에 생 앙투안은 시간을 얼려둔 듯한 모습이 됐다. 지금은 디즈니 영화에 나올 법한 중세 마을처럼 보인다. 다만 수도관과 간헐적인 와이파이가 얹혀 있다. 롱지스는 “이제 우리는 순례자를 맞이하지 않아요. 대신 관광객을 맞지요”라고 말했다.
관광산업은 생 앙투안이 다른 마을들처럼 인구가 빠져나가 텅 비는 것을 막았다. 롱지스는 “방문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죽은 마을’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좋지 않으니까요.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래도 주민이 아직 1200명이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롱지스는 “1280명입니다”라고 정정했다.
프랑스 시골의 ‘농촌 탈출’은 이미 80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진짜 프랑스’는 교회 첨탑이 솟은 석조 마을이 아니라, 파리 외곽 지역의 단층 주택가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어떤 시골 마을에는 농업 전성기의 흔적으로 80대의 농부 미망인 몇 명만 남아 있다. 의사도, 빵집도, 학교도 없다. 하지만 생 앙투안에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식료품점, 약국, 공유 사무실, 여러 식당(일부는 파리만큼 비싼 가격을 받는다), 언어치료사를 포함한 보건 전문가, 소방대, 게스트하우스까지 있다. 나는 ‘랑토냉(L'Antonin)’이라는 숙소에 묵었는데, 작은 베란다의 공동 테이블에서 모두 함께 아침을 먹어야 해 외향적인 사람에게 더 잘 맞는 곳이었다.
마을에는 장인들도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토프 셰브느망은 해양학자로서의 학문적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석공이 됐다. 그는 그랑드 쿠르의 작업실에서 네 개의 도구를 보여주었다. 모두 그의 중세 조상들도 쓸만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것들만 있으면 수도원을 지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관광은 이런 사업들을 살려준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과잉 관광’에 불만을 품고 있다. 롱지스 읍장은 “주민의 20~30%는 모든 것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오는 것도 원하지 않고, 건물에 돈 쓰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방문객이 자기 욕실까지 들이닥칠까 봐 걱정해요”라고 덧붙였다. 사막에서 은둔했던 성 안토니우스라면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이제르 관광청
롱지스 읍장은 여전히 TV에서 받은 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녀와 이제르 지역 홍보팀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비견될 정도로 캠페인을 벌였다. 그녀는 방문객이 30~40% 늘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반대파를 달래려 외교적인 말을 덧붙였다. “저에게는 관광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8월 23일 열리는 마을의 연례 중세 축제에는 보통 1만1000명가량이 오는데, 올해는 그 수를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새 쓰레기통과 반려견 배설물 봉투를 주문했다. “저도 여기 사니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사실 그녀는 이 마을 토박이는 아니다(남편은 토박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마음으로는 생 앙투안 사람”이라 부른다. 그녀의 남은 인생 계획은 이웃 마을 샤트의 요양원에 들어간 뒤, “마지막 정거장”으로 생 앙투안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그녀는 주차 공간을 늘리고 유료 캠핑장을 만들고 싶어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마을 축구장 옆에 무료로 텐트를 친다. 또한 그녀는 TV 상을 지렛대 삼아, 모든 프랑스 지자체장에게 있어 성배와도 같은 중앙정부 보조금을 더 확보하려 한다.
그녀는 반대파 주민들에게 약속했다. “우리에게 백만 관광객이 몰리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내가 본 관광객은 몇십 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랑스적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서도 항상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 잡는 소고기, 돼지고기, 송어 요리로 유명한 ‘타베른 뒤 벨리에 루주(Taverne du Bélier Rouge)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타베른 뒤 벨리에 루주
생 앙투안은 베네치아가 아니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되자, 나는 이미 몇몇 얼굴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박물관에서 모셀랭을 인터뷰한 뒤 근사하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중세 음악에 맞춰 행진하는 커플들의 리허설이 지나갔다. 그 대열 속에는 모셀랭이 있었고, 바로 뒤에는 읍장 롱지스가 따랐다.
롱지스는 새로 오는 관광객들이 하루쯤 생 앙투안 마을에 머문 뒤, 이제르 지역의 다른 "보석 같은 마을들"로 발길을 넓히길 바란다. 그녀는 “이제 주변 마을들이 스스로를 ‘생 앙투안 바로 옆’이라고 홍보하지요”라고 말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생 마르슬랭은 크리미한 소 치즈로 유명하다. 자부심 강한 현지인 한 명은 나에게 “이곳은 견과류의 수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생 앙투안 마을은 베르코르(Vercors) 고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지역은 전쟁 당시 유대인을 숨겨주던 레지스탕스로 유명하다. 비시 정부 관리들이 웬만하면 찾지 않던 산악 마을들이었다. 바시외 앙 베르코르(Vassieux-en-Vercors)에는 독일군이 1944년 7월 학살로 불태운 ‘순교의 마을’을 기리는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다. 나는 또 다른 베르코르 지역 마을 퐁 앙 루앙(Pont-en-Royans)을 찾았다. 산비탈에 매달린 듯 지어져 부른(Bourne) 강으로 내려가는 이 마을의 지형 덕분에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엄격한 프랑스 문화 비평가들은 20세기에 지은 건물 몇 채 때문에 마을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강 위로는 ‘매달린 집들’이 늘어서 있다.
퐁 앙 루앙의 관광 테마 중에는 물도 있다. 이곳에는 호텔을 겸한 물 박물관이 있고, 아마도 세계 유일한 ‘워터 바’가 있다. 다만 이를 운영하는 여성은 “예전에는 다른 곳들에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모두 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와 한 프랑스 가족을 이끌고 ‘물 테이스팅 세션’을 진행했다. 와인 시음을 방불케 하는 언어였다. “이 물은 드라이합니다. 중탄산염과 나트륨이 풍부하죠… 갈로-로마 시대 수원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파리의 고메 워터 대회에서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내게 평가를 부탁했을 때, 나는 다양한 물을 묘사할 어휘를 떠올리지 못했고, 그 결과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함께 한 가족은 훨씬 나았다. 두 꼬마는 유리잔을 한 모금씩 신중하게 마시며 “이제 우리는 사부아(Savoie)로 가요!”라고 말하며 프랑스 문화의 근간인 ‘맛 비평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꼬마들의 아버지는 25년 경력의 수자원 업계 종사자로, 워터 소믈리에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프랑스의 물 규제 기관들이 “조금 아야톨라(이슬람 성직자) 같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신중함은 높이 평가했다. 워터 소믈리에는 “물은 생명입니다!”라고 말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강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호텔 테라스에서 홍합과 감자튀김을 먹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최상이다.
프랑스 시골마을 생 안투안 라바이. 십자군 전쟁 후 이곳에 병자들이 모이며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다.
사진: 트위터
매년, 프랑스 3 TV 채널은 ‘프랑스인의 가장 사랑받는 마을’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해 시청자들이 투표로 우승자를 정한다. 올해 생 앙투안 라바이(Saint Antoine-l'Abbaye)이라는 마을이 14개 최종 후보에 들자, 마을 주민들은 7월 2일 결승 생방송을 보기 위해 마을회관을 가득 메웠다. 한 주민은 “8등만 해도 괜찮다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해안가의 마을들이 내륙에 있는 생 앙투안보다 유리했다. 이 마을의 읍장 마리린 롱지스조차 여기를 “프랑스 한 구석에 있는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곳은 그르노블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걸리는 내륙에 있다.
그러나 이 언더독이 승리했다. 회관에 모 주민들이 “마-리-린!”을 외치는 동안, TV 화면 속의 마라린 롱지스는 진행자에게 “저는 너무 기쁩니다… 기쁘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리린 롱지스 읍장
한 달 뒤, 마리린 롱지스는 마을 중심 광장 ‘그랑드 쿠르’에 자리한 시청에서 나를 만나 “많은 주민이 우승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요”라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관광객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경제 개발 자체를 싫어한다. “내년에 선거가 있습니다.” 그녀는 우려했다. 생 앙투안의 정치인들은 정당 소속이 없어, 개인의 평판으로 선거에서 승부를 봐야한다.
진짜로 “가장 사랑받는 마을”에 뽑혔다는 이유로 읍장 선거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프랑스 코미디 여배우 같은 표정을 지닌 롱지스는 파란 마스카라로 강조된 눈을 크게 뜨며 “그렇다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떨어지면 남편은 기뻐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생 앙투안 마을의 기적적인 승리 이야기는 곧 프랑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파리로 떠나면서, 그림엽서 같은 마을 수백 곳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날 ‘잘 사는 프랑스 시골 마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래전에 죽은 이집트인의 유골 위에 세워진 생 앙투안 마을이 답을 내놓으려 한다.
위치
카프카의 소설 『성』 속 마을처럼, 생 앙투안은 단 하나의 건물에 가려져 있다.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적어도 전해지기로는) 이집트의 성인 안토니우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파두아의 안토니우스나 다른 여러 성인 안토니우스와는 혼동하면 안 된다. 이 이집트 성인은 서기 251년에 태어나 수도사가 되었고, 사막을 헤매며 맹수를 물리치고 육욕을 이겨내며 하나의 종파를 창시했다. 그는 105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며 죽은 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전기를 썼다. 이 기록은 여러 필자에게 복사되고 왜곡되며, 기독교 수도원 주의의 아버지라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의 유해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장소에 묻혔다가 수 세기 뒤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고, 다시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1070년경 프랑스 기사 조슬랭이 이를 자기 마을로 가져간다는 허락을 받았다. 생 앙투안 박물관장 제랄딘 모셀랭에 따르면 “조슬랭은 그 유해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고, 결국 교회에 공개 전시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 수도원은 4세기에 걸쳐 건축되어 1490년에 완성됐다. 안토니우스의 유해가 수도원의 핵심 소장품이었지만, 누구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은으로 만든 상자 안에 보관돼 있다. 내가 읍장에게 “만약 그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안토니우스라면, 그가 평생 와본 적도 없는 이 프랑스 땅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행복해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은으로 만든 상자 안에 실제로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세의 여러 왕들과 많은 순례자들이 그 상자 때문에 이 마을로 몰려왔다. 주된 이유는 성 안토니우스가 ‘성 안토니우스의 불꽃병’이라는 질환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병은 환각증상(LSD와 비슷), 피부 병변, 괴저를 일으켰다. 수도원 주변으로 병원이 속속 세워졌다. 절단 수술을 받을 환자, 가난한 여성, 임산부 등 방문자 집단별로 병원들이 나뉘었다. 마을 박물관에는 그때 썼던 무시무시한 톱들이 전시돼 있다.
병자가 아닌 일반 순례자들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생 앙투안을 찾았다. 지금도 마을 아래쪽에서 수도원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돌길 ‘굴렛(goulets)’을 오르면 숨이 찰 수 밖에 없는데, 중세에는 신자들이 그 길을 무릎으로 오르도록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생 안투안 마을은 두 개의 경제 축을 갖게 됐다. 베네딕트회 수도승들이 주도한 순례 관광 산업과, 병원 수사들이 운영한 의료 산업이었다. 이 두 집단이 서로 충돌했을 때, ‘오스피탈리외르(Hospitaliers: 병원사람들)’라 불린 병원 수사 측이 승리했다. 그들은 곧 순례자 관광 사업까지 장악하게 됐다.
마을은 그렇게 오스피탈리외르라는 말이 '접객산업'을 의미할 정도로 보편화될만큼 수 세기 동안 번영했지만, 결국 일련의 재앙이 덮쳤다. 먼저 1596년, ‘성 안토니우스의 불꽃병’의 의학적 원인이 밝혀졌다. 곰팡이에 오염된 호밀이었다. 치료법은 단순했다. 오염된 호밀을 먹지 않으면 됐다. 이 마을을 찾는 불꽃병 환자들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전쟁이 생 앙투안을 휩쓸었다. 더 나쁜 것은, 성지순례가 시대에 뒤처진 풍습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1777년, 병원 수사들은 사라지고 조직은 몰타 기사단에 흡수됐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생 앙투안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정체됐다. 시청에 걸린 인쇄 지도를 보면 400년 전의 마을이 묘사돼 있다. 롱지스 읍장은 “요즘도 주민들이 이 지도를 보면서 ‘저기 우리 집이 있네!’라고 말해요”라고 했다. 거의 변한 것이 없다. 광장의 일부 건물들이 다른 용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늘날 더 이상 마구간이나 순례자 식당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내가 “20세기에 만든 건물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노란 집 하나가 있다고 답했다. “왜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저걸 대체 누가 허가했는지… 저는 아니에요.”
사진: 트위터
시골의 과거를 숭배하는 향수 어린 나라에서, 수세기 동안 경제 발전이 없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다. 중세 이후의 정체 덕에 생 앙투안은 시간을 얼려둔 듯한 모습이 됐다. 지금은 디즈니 영화에 나올 법한 중세 마을처럼 보인다. 다만 수도관과 간헐적인 와이파이가 얹혀 있다. 롱지스는 “이제 우리는 순례자를 맞이하지 않아요. 대신 관광객을 맞지요”라고 말했다.
관광산업은 생 앙투안이 다른 마을들처럼 인구가 빠져나가 텅 비는 것을 막았다. 롱지스는 “방문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죽은 마을’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좋지 않으니까요.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래도 주민이 아직 1200명이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롱지스는 “1280명입니다”라고 정정했다.
프랑스 시골의 ‘농촌 탈출’은 이미 80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진짜 프랑스’는 교회 첨탑이 솟은 석조 마을이 아니라, 파리 외곽 지역의 단층 주택가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어떤 시골 마을에는 농업 전성기의 흔적으로 80대의 농부 미망인 몇 명만 남아 있다. 의사도, 빵집도, 학교도 없다. 하지만 생 앙투안에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식료품점, 약국, 공유 사무실, 여러 식당(일부는 파리만큼 비싼 가격을 받는다), 언어치료사를 포함한 보건 전문가, 소방대, 게스트하우스까지 있다. 나는 ‘랑토냉(L'Antonin)’이라는 숙소에 묵었는데, 작은 베란다의 공동 테이블에서 모두 함께 아침을 먹어야 해 외향적인 사람에게 더 잘 맞는 곳이었다.
마을에는 장인들도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토프 셰브느망은 해양학자로서의 학문적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석공이 됐다. 그는 그랑드 쿠르의 작업실에서 네 개의 도구를 보여주었다. 모두 그의 중세 조상들도 쓸만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것들만 있으면 수도원을 지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관광은 이런 사업들을 살려준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과잉 관광’에 불만을 품고 있다. 롱지스 읍장은 “주민의 20~30%는 모든 것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오는 것도 원하지 않고, 건물에 돈 쓰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방문객이 자기 욕실까지 들이닥칠까 봐 걱정해요”라고 덧붙였다. 사막에서 은둔했던 성 안토니우스라면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이제르 관광청
롱지스 읍장은 여전히 TV에서 받은 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녀와 이제르 지역 홍보팀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비견될 정도로 캠페인을 벌였다. 그녀는 방문객이 30~40% 늘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반대파를 달래려 외교적인 말을 덧붙였다. “저에게는 관광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8월 23일 열리는 마을의 연례 중세 축제에는 보통 1만1000명가량이 오는데, 올해는 그 수를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새 쓰레기통과 반려견 배설물 봉투를 주문했다. “저도 여기 사니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사실 그녀는 이 마을 토박이는 아니다(남편은 토박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마음으로는 생 앙투안 사람”이라 부른다. 그녀의 남은 인생 계획은 이웃 마을 샤트의 요양원에 들어간 뒤, “마지막 정거장”으로 생 앙투안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그녀는 주차 공간을 늘리고 유료 캠핑장을 만들고 싶어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마을 축구장 옆에 무료로 텐트를 친다. 또한 그녀는 TV 상을 지렛대 삼아, 모든 프랑스 지자체장에게 있어 성배와도 같은 중앙정부 보조금을 더 확보하려 한다.
그녀는 반대파 주민들에게 약속했다. “우리에게 백만 관광객이 몰리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내가 본 관광객은 몇십 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랑스적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서도 항상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 잡는 소고기, 돼지고기, 송어 요리로 유명한 ‘타베른 뒤 벨리에 루주(Taverne du Bélier Rouge)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타베른 뒤 벨리에 루주
생 앙투안은 베네치아가 아니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되자, 나는 이미 몇몇 얼굴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박물관에서 모셀랭을 인터뷰한 뒤 근사하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중세 음악에 맞춰 행진하는 커플들의 리허설이 지나갔다. 그 대열 속에는 모셀랭이 있었고, 바로 뒤에는 읍장 롱지스가 따랐다.
롱지스는 새로 오는 관광객들이 하루쯤 생 앙투안 마을에 머문 뒤, 이제르 지역의 다른 "보석 같은 마을들"로 발길을 넓히길 바란다. 그녀는 “이제 주변 마을들이 스스로를 ‘생 앙투안 바로 옆’이라고 홍보하지요”라고 말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생 마르슬랭은 크리미한 소 치즈로 유명하다. 자부심 강한 현지인 한 명은 나에게 “이곳은 견과류의 수도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생 앙투안 마을은 베르코르(Vercors) 고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지역은 전쟁 당시 유대인을 숨겨주던 레지스탕스로 유명하다. 비시 정부 관리들이 웬만하면 찾지 않던 산악 마을들이었다. 바시외 앙 베르코르(Vassieux-en-Vercors)에는 독일군이 1944년 7월 학살로 불태운 ‘순교의 마을’을 기리는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다. 나는 또 다른 베르코르 지역 마을 퐁 앙 루앙(Pont-en-Royans)을 찾았다. 산비탈에 매달린 듯 지어져 부른(Bourne) 강으로 내려가는 이 마을의 지형 덕분에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엄격한 프랑스 문화 비평가들은 20세기에 지은 건물 몇 채 때문에 마을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강 위로는 ‘매달린 집들’이 늘어서 있다.
퐁 앙 루앙의 관광 테마 중에는 물도 있다. 이곳에는 호텔을 겸한 물 박물관이 있고, 아마도 세계 유일한 ‘워터 바’가 있다. 다만 이를 운영하는 여성은 “예전에는 다른 곳들에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모두 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와 한 프랑스 가족을 이끌고 ‘물 테이스팅 세션’을 진행했다. 와인 시음을 방불케 하는 언어였다. “이 물은 드라이합니다. 중탄산염과 나트륨이 풍부하죠… 갈로-로마 시대 수원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 파리의 고메 워터 대회에서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내게 평가를 부탁했을 때, 나는 다양한 물을 묘사할 어휘를 떠올리지 못했고, 그 결과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함께 한 가족은 훨씬 나았다. 두 꼬마는 유리잔을 한 모금씩 신중하게 마시며 “이제 우리는 사부아(Savoie)로 가요!”라고 말하며 프랑스 문화의 근간인 ‘맛 비평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꼬마들의 아버지는 25년 경력의 수자원 업계 종사자로, 워터 소믈리에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프랑스의 물 규제 기관들이 “조금 아야톨라(이슬람 성직자) 같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신중함은 높이 평가했다. 워터 소믈리에는 “물은 생명입니다!”라고 말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강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호텔 테라스에서 홍합과 감자튀김을 먹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최상이다.
(사이먼 쿠퍼는 프랑스 이제르 지역 관광청의 초청을 받아 이 기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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