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험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2025-03-14


위험한 상황은 우리 삶의 일부다. 하지만 이를 맞서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2025년 2월 22일

에누마 오코로 - The Financial Times


5년 전 쯤 읽었던 글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 가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이야기는 내가 읽은 현대 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고 느낀다. 작가 슈루티 스와미의 단편소설 '밤의 정원'이다.


이 이야기는 비지라는 인도 여성에 관한 것이다. 비지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개 닐라가 내는 낯선 소리를 듣는다.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니 "친근하고... 검은색이며 다정하고 여우같은" 닐라가 "머리를 들고 목덜미를 펼친" 코브라와 대치하고 있다. 개는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이제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비지는 한 의사에게 전화해 조언을 구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그저 지켜보기만 하며 뱀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집에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가 집중력을 잃고 아마도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우리는 비지와 함께 계속 긴장하며 지켜본다. 저 두 동물 사이의 미묘한 춤과 그들 사이를 오가는 두려움, 우위가 바뀔 수 있는 방식을 말이다. 누가 살아남을지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집과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필요한 일을 하는 개의 용기와, 공포와 희망을 동시에 품고 그저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비지의 무력함 때문이었다. 바로 지난 주 나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분노와 두려움, 결단력과 확고한 용기 사이를 오가는 시기에 어떻게 삶을 헤쳐 나갈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의 정원'이 불현듯 다시 머리에 떠올라,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적'이란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자주 생각하는 주제는 아니다. 나는 닐라가 위험을 인식하고 그 앞을 막아서기로 한 결정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동물이 이성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인 존재라고 여기지만, 나는 이 소설 때문에 우리가 위험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화재라든가 물리적 공격과 같은 명백한 위험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이 천천히 나의 신뢰 안에 파고들거나, 내가 나 스스로를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빠져들도록 놔두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과 같은 조용한 위험 말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그런 종류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때때로 우리 스스로가 본능을 부정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눈앞에 보이는 것마저 무시하기로 선택하는 것인지?


Pierre Roy, ‘Danger on the Stairs’ (1928) 


20세기 초 프랑스 화가 피에르 로이는 아주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기묘하고 불안한 대비를 이루는 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계단의 위험'은 그의 그림 중 잘 알려진 작품으로, 대리석 벽과 닫힌 나무문 한 쌍, 그리고 캔버스 왼쪽을 따라 내려오는 난간이 있는 아파트 계단을 묘사한다. 그림의 중앙에는 길고 두꺼운 몸을 가진 뱀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바닥으로 미끄러지고 있다. 뱀은 혀가 튀어나오고 들린 머리는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계단실의 공간감은 거의 들릴 듯한 침묵의 효과를 내면서 이 건물의 그 누구도 어떤 위험이 안으로 들어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내게는 충격적이면서도 두려운 이미지의 그림이다.


뱀은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 중엔 변화와 재탄생이라는 긍정적인 영적 상징도 있다. 그러나 서구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 뱀은 거리를 두어야 할 악의 상징으로 설정되어 있다. 내가 이 그림에 충격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가장 예상하지 못할 때 어떻게 위험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집이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야 하는 장소다. 언제, 또 어떻게 위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으로 들어오는가?


나는 이 그림을 은유적으로 읽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주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위협이 어떻게 우리 삶에 스며들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다. 관심이 필요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가장 편안해지기 쉬운 장소에서 특히 그렇다. 또는 경고의 신호를 외면할 때가 그렇다. 아마도 이 집에서는 대문이 방치되거나 열려 있어서 뱀이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잘 지켜졌어야 할 경계선이 침범 당했다.



Marc Chagall, ‘The Fall of Icarus’  (1975) 


러시아 태생 화가 마르크 샤갈은 1975년, 그의 긴 생애의 말년에 '이카루스의 추락'을 그렸다. 샤갈은 1941년 나치 점령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도피했던 것, 그리고 몇 년 후 그의 사랑하는 아내 벨라가 너무 일찍 죽은 것과 같은 격동과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이 화려한 그림에서는 날개 달린 인물 하나가 하늘에서 한 무리의 마을사람들 위로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샤갈이 그리스 신화 이카루스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그와 아들이 크레타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만들었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일단 공중에 뜨자 힘과 속도의 느낌에 압도되어 높게 날았다. 날개가 녹고 죽음에 이를 만큼.


내가 여기에 샤갈의 그림을 포함시킨 이유는 '위험'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연구했을 때, 13세기 중반 앵글로-프랑스어 'daunger'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거만함, 무례함"을 의미한다. 이는 위험과 거만함이 종종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흥미롭게 상기시켜준다. 한계를 무시하고 혼자서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카루스의 믿음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샤갈의 묘사에서, 이카루스는 군중이 모인 마을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의 오만함은 자신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전체 지역사회에도 위험하다. 우리는 종종 거만한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부풀려진 권력 의식을 갖고 있고 한계를 무시한다면 그가 한 마을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도 있음을.



Winslow Homer, ‘Danger’ (1883-87) 


이 그림에는 차분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다. 윈슬로 호머의 19세기 후반 작품 '위험'이다. 회색, 파란색, 붉은 갈색 팔레트의 바다 풍경화다. 격렬하게 바람이 부는 날 파도는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며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두 여성이 해안을 따라 길을 찾으려고 손을 잡고 있다. 이들의 간결한 옷차림으로 보아 날씨에 대비하지 않은 것 같으며, 주위를 둘러싼 위협적인 분위기와 맞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작품에 정말 끌렸다. 이 작품은 인간이 만든 것이든 자연적 원인의 결과든 위험한 상황들이 삶의 여정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우리 자신이나 가족, 심지어 우리 공동체에 대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여성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손을 맞잡고 함께 상황에 맞선다. 그것이 이 그림을 아름답게 만드는 부분이며, 나는 이 주제에 있어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슈루티 스와미의 단편소설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닐라가 코브라와 맞서는 동안 비지는 무력했을지라도 끝까지 함께 서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존재가 닐라가 물러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우리 앞에 무엇이 닥치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이 최전선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밤을 샐 의지가 있는 사람 말이다. 위험의 존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함께 도전과 역경에 맞서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 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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