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드라마: 젤렌스키는 트럼프에게 왜 무시 당했나

2025-03-01



한국시간 토요일 새벽,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 밴스 부통령이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바탕 말싸움을 벌였습니다. TV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영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상회담 중인 외교 정상들이, 그것도 우방국 정상들끼리 싸우는 건 외교의 세계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이견이 있더라도 미리 조정을 하고 공식석상에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그런 조율이 되어보이지 않았습니다.

말다툼을 끝내고 트럼프 대통령은 'TV 시청률 올라가겠다'고 자조적 농담까지 했습니다. 러시아 외무부는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때리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볼 때, 덩치 큰 미국인 두 명에게 2:1로 공격당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그런데 젤렌스키가 도와달라고 남의 집에 부탁하러 온 입장에서 무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남의 집에선 집주인 기분을 맞춰주는 게 옳습니다. 손님이야 안 좋은 기억이 있어도 털고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집주인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다만 젤렌스키 입장에서 외국어(영어)로 얘기하다보니 조금 표현이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트럼프도 감안해줬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바다 건너에 있지만 언젠간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이 특히 트럼프를 분노하게 했는데 젤렌스키가 모국어로 얘기했더라면 좀 순화해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작은 늬앙스 차이에 불필요하게 감정 상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선 통역을 쓰는 게 안전합니다. 바꿔말하면 젤렌스키가 통역을 안 쓸 정도로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군복에 군화 신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면 짧은 영어라도 다 들어주겠지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만 3년을 넘긴 현재 우크라이나 전황은 한국전쟁 때 남한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참호전 혹은 고지전만 계속되며 정치인들이 명분을 내세우는 동안 전선에서 젊은이들만 의미없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벌어진 한국전쟁도 첫 1년 동안만 전선의 이동이 있었을 뿐 후반 2년 간은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었습니다.(아래 영상) 작은 산 하나, 고지 하나를 뺏기 위해 수천 명의 병사를 희생하고 바로 다음날 다시 상대방에 빼앗기고, 그런 식으로 전선이 38선 근방에서 정체됐습니다. 그래서 전선의 이동은 미미했지만 전체 사망자의 거의 절반이 그 후반기에 발생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한국전쟁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2024년 예정됐던 대통령 선거를 취소하고 임기를 연장했다고 비판 받는 젤렌스키와는 달리,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인 1952년에 예정된 2대 대통령 선거를 치뤄 국민들의 확실한 재신임을 받았습니다.

그 선거는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는 직접 선거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이시영 후보를 이기고 74.6%의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대 특표율입니다. 직선제 도입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잡아가두는 등 문제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가 일반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음이 너무도 명확해 국내외 누구도 그의 리더십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을 독재자라 불렀던 국제사회의 비판은 쏙 들어갔습니다.

직선제 선거를 통해 국민적 지지와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확보한 이승만 대통령은 시종일관 미국과 UN군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진작부터 한반도에서 군대를 빼고자 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에게 때론 부탁을, 때론 협박을 하고 밀당을 하면서 '미국의 안보 보장 없이는 북한 및 중공과 휴전할 수 없다. 미국이 빠지면 우리 혼자서라도 계속 싸우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는 결국 1953년 휴전을 하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안보를 보장 받는 상호방위조약을 따냈습니다. 대한민국이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한국 같이 힘 없는 나라가 미국의, 아니 강대국의 안보 보장을 받아낸 사례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이승만에게 외교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닙니다. 이 조약은 70년 넘게 현재까지도 튼튼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미안보조약에 기반해 한국은 경제발전에 집중해서 현재와 같은 번영을 이뤘습니다. 이 모든 성과의 근본은 1952년 전쟁 중 벌어진 제 2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선례를 생각해보면, 우크라이나도 2024년에 예정됐던 대선을 치뤘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야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외 협상력도 높아졌을 것이고, 독재자라는 조롱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혼자서라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로 국제사회를 설득하려면 우선 지도자가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시켜야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현재 계엄령 중이라 각종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이승만은 계엄을 해제하고 선거를 진행했었습니다. 역시나 대통령 본인 의지의 문제입니다.



사실 미국이나 한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이 지금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우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진영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가 민주주의 아닌, 선거 없이 특정인이 권력을 잡는 독재국가라면, 국제사회가 굳이 젤렌스키 정권을 지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라 선거를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1952년의 우리나라 상황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계엄령을 이유로 선거를 치르지 않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지시킨 젤렌스키의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외교력을 계속 갉아먹고 있습니다.

어제 젤렌스키와의 의견차이를 확인한 트럼프는 협상을 멈추고 젤렌스키의 사임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사임하지 않으면 휴전이고 뭐고, 당장 미국의 지원을 끊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젤렌스키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지, 과연 미국이 내민 휴전 조건에 동의할지 궁금해집니다. 일단 그는 트위터에 글을 올려 '미국인들에게 정말로 감사하다'고 말해 한 발 물러선 모습입니다. 어찌됐든 협상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애초에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 Okhot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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